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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Jul 13. 2023

나의 열세 번째 남자

느낌이 좋은 사람, 다른 조건은 필요 없었다.

  주룩주룩 비가 쏟아진다.

  열세 번째 남자! 그 남자를 만나러 가던 날도 아침부터 빗줄기가 세찼다. 얼굴도 모른 채 달랑 이름 석자만 들고 빗길을 뚫어야 했던 나. 처량 맞은 신세였다.


  호텔 찻집에서 부모님을 대동한 선 보는 일이 차츰 심드렁해질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난데없이 고향으로 내려가 임무를 수행하라는 것이다. 지방으로 원정까지 가서 선을 봐야 한다는 사실이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안 갑니다."

  "가야 한다."

  "절대로 못 갑니다."

  "반드시 가야 한다."

  쑥 나온 입으로 툴툴거리며 부모님과 한동안 옥신각신했다.


  결국, 등쌀에 쫓겨나다시피 시외버스 터미널로 터덜터덜 발길을 옮겼다. 하필이면 장마철 빗속에 남자를 찾아나가라고? 만남을 주선한 이모부의 체면을 봐서 버스에 몸을 싣기는 했으나, 실오라기만큼의 기대도 없었다.


  뿌연 차창 밖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많은 사람들 중 반이 남자인데 그 하나를 못 만나 궁상을 떨고 있구나, 하는 자책이 들었다. 덜컹거리는 버스 유리창에 부딪히는 물줄기조차 나를 조롱하듯 약을 올리며 흘러내렸다.

  ‘보나 마나 뻔할 텐데…’


  지금까지 서울 중심가 한복판에서도 찾지 못한 남자를 무슨 수로 시골 구석에서 만나라는 건가. 나의 남자 보는 기준은 아주 단순했다. 느낌이 좋은 사람, 다른 조건은 필요 없었다. 그 느낌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첫 느낌이 중요했다.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인 결혼을 느낌으로 결정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냐며 사람들은 웃었지만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울렁거리는 차멀미를 참아가며 이윽고 읍내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방에 붙은 간판부터 쭉 훑었다. 길 양쪽으로 즐비하게 다방이 늘어서 있었다. 장미다방. 역전다방, 아네모네다방, 황금다방, 본전다방 등 이미 이름 자체에 촌티가 줄줄 흘러내렸다.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엄마가 집을 나가는 딸의 뒤통수에 대고 세 번이나 힘주어 말했던 그 다방을 찾았다. 좌우로 몇 번인가 두리번거리자 임무를 수행할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오시오다방'일게 뭐람?'


  심호흡을 깊게 하고 다방 문고리를 잡았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구릿빛 얼굴을 한 사람들의 눈빛이 일제히 내 몸으로 박혔다. 얼른 한가운데에 놓인 대형 수족관으로 눈길을 돌렸다. 열대어들한테 이 멋쩍은 기분을 적나라하게 들켜버렸다. 벽에 붙은 대형 거울로 담배 연기 자욱한 실내를 엿보니 온통 나이 든 아저씨들뿐, 젊은 남자가 없는 거다.

  ‘혹시 저들 중 한 사람은 아니겠지.’


  잠시 후 이모부가 들어오더니 뒤통수를 보이며 구석에 앉은 한 남자하나테로 데려갔다. 벌떡 일어서며 고개를 돌리는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나는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와, 저토록 때 묻지 않고 맑은 눈동자를 본 적이 있던가.'


  하얀 와이셔츠에 짧은 머리가 상큼했다. 얼음장이 된 몸이 서서히 풀리며 정신을 차려보니 편안한 표정을 가진 미남이 아닌가. 풋풋한 이미지에 순수한 영혼이 담겼고, 차분한 태도에 진솔한 향기가 풍겼다.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조차 멋져 보였다. 기적이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없던, 그 느낌 있는 남자가 촌구석 ‘오시오다방’에 숨어 있었다는 건.


  읍성에서 백 년이 넘도록 서 있던 소나무 아래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고향이 같아 어릴 적 추억을 불러오기에 잘 맞았고, 서로 다른 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기에 연결 고리는 더 두터울 수 있었다. 하나의 우산 위로 또록또록 떨어지는 빗방울은 장밋빛 미래를 위한 연주 소리로 들렸다. 산성 공원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며 잦아드는 빗줄기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햇살을 맞았다. 낙엽에 관한 이야기 만으로도 함께 밤을 지새울 만한 남자, 그가 바로 나의 열세 번째 남자다.


  그것이 마지막 선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뒤로도 맞선 자리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느낌 있는 남자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조건만 맞으면 허락하자, 모질게 마음먹었지만 열세 번째 남자의 해맑은 웃음이 상대방 얼굴에 겹쳐 보였다. 환상에서 벗어나 이젠 종지부를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스 번째 선보는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영원히 혼자 살리라 굳게 맹세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 해가 바뀐 어느 날, 우연하게 지인으로부터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던 그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만남은 쉽사리 다시 이어지고, 양쪽 집안의 상견례를 치른 후, 일사천리로 결혼이 진행되었다.


  결혼식 하는 날, 신랑이 신부대기실 창밖을 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뒷모습도 역시 훤칠하게 보였다. 신랑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아니! 새 신랑은 어디 가고, 이 대 팔 비율로 쫙 가른 가르마의 어떤 아저씨가 내 손을 덥석 잡는 게 아닌가. 게다가 번지르르한 머릿기름까지 발라 십 년은 족히 더 들어 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초저녁 잠이 많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마을형 아저씨는 새벽부터 부스럭대며 돌아다니는 통에 올빼미형 나는 선 잠을 깨곤 했다. 이슬만 먹고사는 줄 알았던 그의 입에서 돈 얘기가 술술 나왔으며, 건강을 이유로 금연을 시작했기에 담배 피우는 모습도 사라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일찍 자는 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는 내 말에,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어도 늦게 자는 것만은 불가능하다고 맞섰다.

 

  손만 잡고 밤새 이야기꽃을 피울 것만 같던 그 열세 번째 남자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 속을 끓였다 식혔다를 반복하던 신혼 시절이었다.


  울다 웃으며를 반복하며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꾸벅꾸벅 졸면서 잠을 쫓는 남편을 보았다. 밤새워 얘기하는 게 꿈인 여자를 위해 노력 중이라는 말을 했다. 그만 픽하고 웃음이 터졌다. 늦잠 자는 아내를 깨워줘야 한다는 이유로 잠을 서두르는 남자, 더 이상 나이보다 젊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왠지 측은해 보였다. 나의 옹졸함을 깨닫는 순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웬만한 것은 양보하자고 마음먹었다.   


  아침부터 내리던 굵은 장대비가 어느새 부슬부슬 잦아든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어제는 성난 파도처럼 다가오더니 오늘은 달콤한 왈츠처럼 들려온다. 인생 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실감했으니, 이제 제법 철이 든 모양이다.                                      



남자


느낌


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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