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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Jul 28. 2023

걱정 마세요, 우리가 책임질게요

우리 집 수호신, 코끼리여

  우리 집거실 탁자에는 하얀 사기로 된 코끼리상 한 쌍이 앉아 있다. 제법 무게도 나가고 큼지막한 게 빨간색 안장까지 얹혀 눈에 잘 띈다. 나는 아침마다 가족의 건강과 화목을 기대하며 코끼리 등이 윤기 나도록 닦아준다. 여유가 있을 때마다 기다란 코도 정성껏 쓰다듬어 준다.


직장 다닐 때 부잣집 마나님과 한 방을 쓴 적이 있다. 당신이 입은 옷은 모두 비싸고 좋은 것이요, 남의 것은 무조건 하찮게 여기는 분이었다. 부자는 부지런히 머리 굴려 재산을 일군 훌륭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은 남이 머리 굴릴 때 마냥 편하게만 살아온 패배자라 했다. 이솝우화를 예로 들며 가난한 사람을 모두 베짱이에 비유했다. 열심히 일하는 개미 옆에서 노래만 부르며 놀다가 결국 가난뱅이가 되었으니 베짱이와 동격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나를 포함한 동료들은 평범한 사람을 무능력자로 몰아붙이고,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마나님의 잣대가 늘 불만이었다.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야 했던 부자 자랑에 나 또한 두통 증세가 일어나기도 했다. 주말이면 유명 호텔을 순회하며 식사를 한다는 말은 듣기 좋은 자랑이었고, 직장에서 먹는 급식을 쓰레기 취급할 때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우리는 연장자 대접을 해야 했고, 나중에는 그냥 그러려니 포기한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마나님은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면서, 짐 정리하다 나온 자신의 애장품 몇 가지를 들고 왔다. 반지, 스카프, 수저, 컵, 코끼리상 등을 책상 위에 죽 펼쳐놓고는 하나씩 나눠주겠다고 했다. 물론 물건마다 깃든 갖가지 긴 사연을 들어야 하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외국에서 아들이 사 왔다는 스카프, 해외여행 때 사 왔다는 반지, 가정부가 일주일마다 반짝반짝 닦는다는 은수저 등 끝도 없는 사연들이 이어졌다. 사람들의 눈초리는 오로지 코끼리상한테 꽂혀 있었다. 코끼리상 이외의 것들은 모두 건성으로 넘겨버렸다. 시간 날 때마다 우리한테 입이 닳도록 자랑해 왔던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인도 여행에서 사 온 코끼리상이 집안으로 들어온 날부터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직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코끼리는 예로부터 재물을 불러 모으고, 가족의 화목을 가져온다는 속설이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갈퀴로 돈을 긁어모으게 한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욕심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코끼리한테 눈독 들이는 건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다.  


평소 부잣집 마나님에 대한 곱지 않던 시선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워졌다. 과연 누구한테 코끼리상이 돌아갈까? 내 눈에는 숨죽인 눈빛, 말없는 애원까지 훤히 보였다. 그들 눈에도 내 모습이 그렇게 보였으리라. 세상에, 살벌한 무언의 경쟁을 뚫고 내게 낙점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평소 밉보이지 않았던지 나를 지목하여 코끼리상을 덥석 안겨주는 게 아닌가. 재물을 모아줄 신비한 그 복덩이를 안는 순간, 가슴이 쿵쾅거렸다. 화끈 달아오른 얼굴에 웃음이 새어 나올까 봐 연신 헛기침만 해댔다. 외모에 특별한 관심이 없으니 반지나 스카프는 소용없고, 집안에 흔한 것이 수저였으니 재물과 관련 있는 쪽에 욕심이 가는 건 당연하였다. 다된 밥을 나한테 빼앗기기라도 한 듯 못내 아쉬워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해서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코끼리를 모셔놓고 매일 눈을 맞추면서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아주었다. 금방이라도 돈벼락을 맞을 환상 속에서, 언젠가는 부자가 될 거라는 최면도 걸었다. 코끼리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떠한 미동도 없이 늘 무심했지만 ‘행운은 내게로’라는 주문을 외며 매일 눈인사를 했다.


하지만 행운은 빨리 오지 않을 듯했다. 조합 주택에 가입했는데 회사 부도로 인해 투자한 돈을 몽땅 날렸다. 또 집을 샀는데 이익은 고사하고 수 천만 원 손해까지 보면서 팔았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지성이면 감천이지.’라는 믿음으로 닦고 또 닦아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횡재는 없고 오히려 재물이 술술 빠져나가는 형국이었다.


꿈에 부풀어 무거운 걸 양쪽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왔던 날이 떠오른다. 금방이라도 부자가 될 듯 가슴이 벅차오르던 그날, 눈빛으로 기싸움하던 동료들도 생각난다. 갑자기 허탈한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쩌랴.

   '우리 집에서는 왜 신통술을 제대로 부리지 않는 거지?'

   주술의 위력이 한 집에서만 오래 머물러 효력을 잃어버린 게 틀림없다. 한 집에 재물을 몽땅 쌓아주느라 이미 신통술을 상실해 버린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 코끼리를 어찌 한담?'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두 번째의 신통술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코끼리가 상징하는 부와 화목 중, 부는 소멸했으나 가족의 화목은 기대할 수 있지 않은가. 요즘 들어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자주 다니다 보니 건강이나 화목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는 깨달음이 왔다.   


나는 코끼리상한테 새롭게 바라는 점이 있다. 가족의 건강과 화목을 지켜주는 우리 집 수호신으로 거듭 태어나 주기를. 정성스러운 손길로 등을 쓰다듬어주고 서로 긴 코를 마주 대 준다. 무표정하던 코끼리가 갑자기 반색을 하며 화답하는 듯하다.

   ‘가족의 건강과 화목이라면 걱정 마세요. 우리가 책임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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