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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Aug 15. 2023

명심보감만 같아라

오래도록 버팀목이 되어주소서

  친정 집에 들어서면 거실 구석에 수북하게 쌓인 신문지가 눈에 띈다. 한자 공부에 푹 빠진 엄마가 폐지 한 장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글씨 연습을 한 흔적이다. 흰 공간마다 깨알 같은 한자가 촘촘하게 적혀있다. 소파 한쪽에는 세월의 더께를 말해 주는 명심보감이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누워있다. 부모님의 손때가 진득하게 묻어난 채로.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한 엄마는 어려서부터 공부에 대한 열망이 커컸다. 한낮의 고단한 일과를 끝내고도 밤에는 공부에 열중했던 엄마. 선비처럼 책만 읽던 외증조할아버지와는 달리 외할아버지는 기름 닳는다고 밤마다 성화를 댔다. 하는 수없이 종이로 등잔불을 가리면서 한글을 터득해야했다. 칠흑 같은 허공 공책이요, 손가락을 연필 삼아 글씨 연습을 했다. 입으로는 연신 구구단을 중얼거리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외증조할아버지의 어깨너머로 한자 책까지 훔쳐보며 스스로 천자문까지 떼었으니 얼마나 지혜로운 분인가.


엄마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담을 넘어 몰래 야학당에 다녀야 했다. 아녀자가 밤길에 나다니면 큰일 난다며 바깥출입을 금했지만 기를 쓰고 공부를 이어갔다. 우습게도 할아버지가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공부를 마치고 급히 집으로 가는 엄마를 학당 선생이 불러 세다. 느닷없이 손목을 잡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하더란다. 외간 남자에게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에 엄마는 대뜸 사랑채를 떠올렸다. 한시를 읊으면서도 틈틈이 동네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던 외증조할아버지가 거처하던 곳이 바로 사랑방 아니던가. 그 사랑방을 빌려달라는 줄로 알아들은 엄마는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사랑유? 안 돼요. 우리 할아버지한테 지만 혼나유.”


엄마 평생소원은 학교에서 공부 한번 해보는 것이었다. 교복 입은 여학생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그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망부석처럼 서 있었을까. 그토록 배움에 한이 맺혔던 터라 대학출신이라는 아버지의 조건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결혼 승낙 제1순위가 되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아버지는 가난한 농사꾼의 둘째 아들로 찹쌀 한 말과 숟가락 두 개만 달랑 들고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초라한 신접살림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빡빡한 서울 살림에 안 해본 고생 없이 두루 하면서도 자식 교육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자식 모두 성장할 때까지 엄마의 인생은 늘 뒷전이었으며 오로지 살기 위해 고심해 왔다. 이제 모두 출가시켜 놓고 숨을 돌려 자신을 돌아보니 어느새 인생의 끝트머리에 앉아 있다.


다시 책을 잡은 엄마는 인생에 대한 회한이 드는 무게만큼 한자 공부에 무섭도록 몰두한다. 아무리 어려운 한자라도 외우고 또 외우면서 같은 음의 글자를 모두 꿰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한자를 하나하나 분석까지 하며 설명을 곁들여해주는 엄마를 보면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어느새 아버지의 수준을 앞지른 엄마는 ‘걸어 다니는 한자 사전’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한문을 섞어 자유자재로 명심보감에 대해 말씀하기를 즐겨한다. 비록 그 뜻은 몰라도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사대부 집안의 학식 높은 한 여인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명심보감을 집어 들고 엄마 옆에 살그마니 앉았다. 책을 들추려 하자 유독 검은 때가 묻어나는 장이 자연스레 펼쳐진다.

  ‘知足可樂(지족가락)이요, 務貪卽憂(무탐즉우)니라.’

매사 만족할 줄 알면 즐겁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걱정이 많다는 뜻이다. 이 말은 엄마가 즐겨 쓰던 문구로 우리들이 어릴 적부터 밥상머리에서 자주 듣던 말씀이다.


한평생 자신을 위해 욕심 내지 않고, 오로지 베푸는 걸 삶의 미덕으로 삼아온 엄마의 성품과 아주 잘 어울리는 문구다. 젊었을 때부터 지나가는 노인을 위해 밥그릇을 내어 주고, 당신은 굶으면서도 허허 웃었다. 우리들한테도 그런 삶을 살라 몸으로 일러준다. 하지만 엄마가 서 있는 곳은 까마득히 높아 따라가기에 힘에 부친다는 것을 잘 안다. 작은 것에 만족하며 베풂의 자세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오늘은 한 발짝이라도 엄마의 삶에 바짝 다가서고 싶어 명심보감을 읊어본다.

  ‘知足可樂(지족가락)이요, 務貪卽憂(무탐즉우)니라.’

엄마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흐뭇하게 바라본다. 욕심으로 흐트러지는 나를 언제나 바로 잡아 주는 버팀목 엄마, 든든한 당신이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주기를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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