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참 좋은 분이셨습니다

강화 장날에 만든 추억 하나

by 조선여인

강화 장이 서는 날, 엄마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살 것은 딱히 없는데 엄마와 바람이나 쏘이러 장에 간다. 엄마는 발짝을 뗄 때마다 발에 추를 매단 듯 천근만근 힘겨워한다. 부정맥으로 인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는 건 이미 오래전 일이다. 그래도 표정만큼은 기대에 찬 듯 해맑다.


나는 힘줄이 툭툭 불거진 커다란 엄마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엄마의 느린 보폭에 맞춰 걷는다. 이만큼이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며칠 전 입원했을 때 다시는 걷지 못하게 될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던가. 병마를 훌훌 떨쳐버리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오래도록 이 길을 함께 걷고 싶다는 절절함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직장에 매였을 때는 시간에 쫓겨 사느라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 그나마 여행을 좋아하는 동생 부부를 따라나선 게 고작이다. 시간은 인정사정 두지 않고 휙휙 지나가 버린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자주 함께할 수 있을지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며칠 전에 장 구경 가자고 했더니 엄마는 또 딸 편에 서서 물었다.

“너, 시간 있어? 네 할 일도 바쁠 텐데.”

‘자식’의 처지를 먼저 배려하는 마음은 언제쯤이나 ‘엄마’ 중심의 사고로 전환될까. 아흔을 넘겨도 여전히 ‘엄마’는 없고 ‘자식’만 있으니. 평생 몸에 밴 습관이라 고치기가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안타까운 심정이 든다. 남은 물론 자식한테까지 신세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데 왜 자신은 모든 것을 내놓으려 하는지.


옷이든 먹을 것이든 엄마를 위해 사드리려고 하면 늘 따라오는 말이 있다.

“너희나 잘 살아, 내 걱정은 하지 마.”

자신을 위해서는 돈 한 푼 안 쓰면서도 남한테 줄 건 열 손가락을 접으며 센다. 엄마 자신의 몫을 챙기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당신 입보다 다른 사람의 입을 우선으로 챙기기 바쁘다. 남들한테 다 퍼주고 나서 남는 게 있어야 겨우 입에 넣었고, 겨우 몸에 걸쳤을 뿐이다.


흔히 나이가 들어가면 욕심이 늘고, 고집과 아집이 생긴다고 들 한다. 하지만 엄마한테서는 외모를 제외한 노인의 특성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당신도 늙었으면서 힘들어하는 노인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일쑤다. 당신은 못 먹고 아끼는 음식을 남한테는 서슴없이 양보한다. 언제나 남부터 챙겨주는 엄마를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언제 어디서건 인기가 많아 서로 곁에 앉히려고 손짓하며 부를 정도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는 별명이 지금까지도 붙어 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베푸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명심보감 말씀 중 매일 듣던 구절이 하나 있다.

‘착하게 살면 그 끝이 있고, 악으로 살면 그 끝이 없다.’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발 뻗고 못 자도 착한 일을 한 사람은 편히 잘 수 있다는 말이다. 줘가며 살아야 자식 대에 가서 잘 된다는 말도 자주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 대에서나 잘 사시면 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욕심 없이 다 퍼주는 엄마가 바보처럼 보여서였다.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불러온 실화는 또 얼마나 많이 꿰고 있는지 모른다. 욕심에 눈이 어두운 이웃사촌 네가 가산을 탕진하더니 자손 대에 와서는 뿔뿔이 흩어졌다는 얘기. 질투를 일삼고 남 잘되는 걸 시기하던 이웃이 자식 대에 와서는 고향도 등지고 여기저기로 떠돈다는 얘기. 권선징악을 대표하는 단골 이야기는 엄마의 각색 능력에 의해 재미있게 펼쳐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차는 어느덧 강화 장터에 도착했다. 엄마는 이내 호기심 많은 소녀가 되어 반짝이는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멀리 수산물과 건어물 파는 새 건물이 정면으로 보인다. 지나는 거리마다 여러 상점이 줄을 서 있고 채소 파는 난전도 오밀조밀 늘어섰다. 옷 파는 곳에서 잠시 기웃거리려는 찰나, 엄마 손이 잽싸게 내 옷자락을 낚아챘다.

“늙은이가 무슨 옷이 필요하다니?”


손힘이 어찌나 세던지 꼼짝달싹 못 하는 내게 눈을 흘기면서 야단을 친다. 말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엄마는 눈치도 빠른 분이다. 얼마 전에 엄마 옷을 사드렸는데 호통을 치면서 결국은 입지 않으셨다. 필요 없는 것에는 절대로 욕심내지 않는 분이라는 걸 새삼 느끼면서 등 떠밀려 지나쳤다.


강화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도 함께 왔던 곳이다. 오늘은 엄마와 단둘이 왔다. 호떡 파는 포장마차 앞에서 고소한 기름내가 풍겼다. 아버지와 함께 나들이했던 날도 이곳 포장마차에서 호떡을 먹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대상으로 흉보듯 말했다.

“옛날에 호떡 하나 사 먹자고 해도 못 들은 체 그냥 지나치지 뭐냐.”

그 흔한 호떡 하나 사 주지 못한 죄를 안고 살던 아버지는 빙그레 웃음으로 화답했었다.


서로의 눈빛에 아버지의 부재가 아쉬움으로 담겼지만 이내 둘만의 호젓한 시간으로 빠져들었다. 엄마의 한을 풀어드리려고 산 씨앗호떡이 입안을 달콤하게 해 주었다.

호떡집 앞을 지날 때마다 호주머니에 든 돈을 꽉 움켜쥐고 지나쳤다는 말에 콧날이 찡했다.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돈을 남을 위해서는 선뜻 내놓는 선한 마음의 원천은 무얼까. 혹시 아버지도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 같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버지가 타고 있을지도 모를 맑은 구름 한 점이 푸른 하늘에 떠다녔다.


엄마는 만담꾼이다. 눈물 콧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도 구수하게 버무리는 솜씨가 있다. 엄마와 함께한 나들이가 또 하나의 추억으로 남았다. 앞으로 이런 시간을 자주 만들어 추억의 앨범에 차곡차곡 끼워두고 싶다. 언젠가 엄마도 아버지처럼 먼 여행을 떠나게 될 때 앨범을 들춰보리라. 엄마가 남긴 사랑과 추억담을 떠올리게 되리라. '당신은 참 좋은 분이셨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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