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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Aug 16. 2023

천사의 눈을 닮은 아이

더 기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아파트 현관 우체통에 편지 한 통이 꽂혀 있다. 봉투 위에 새겨진 여러 송이의 붉은 카네이션을 리본으로 묶은 그림이 눈에 확 들어온다. 내 이름 석자를 쓴 필체가 낯익다. 수십 년 전에 만났던 제자 *혜*이 보낸 편지이다. 반가워서 얼른 뜯어보니 분홍색 편지지 가득 깨알 같은 마음이 주르륵 쏟아진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 아이의 편지를 받게 된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받아온지 벌써 수십 년째이다. 전화로 소식을 전할 수도 있고, 그 흔한 카톡으로 연락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라 남다른 정성이 묻어난다. 어려서 엄마 잃은 슬픔을 딸에게는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다. 제자의 마음을 읽는 내내 마음이 숙연해진다.

      

<선생님, 딸아이가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좋은 엄마가 되어 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에게 좋은 엄마의 첫째 조건은 건강이랍니다. 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이에게 슬픔을 주지 않으려고요.>     


발령장을 받고 첫발을 내디딘 곳은 서울의 변두리에 있는 작은 학교였다. 부임하자마자 5학년 담임을 했는데 그때 처음 만난 아이다. 작은 체구를 가진 그 아이는 건드리면 픽하고 쓰러질 듯 몹시 가늘었다. 또한 지쳐 엎드리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담임의 관심과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가정환경조사서를 보고서야 엄마가 돌아가신 지 한 달이 채 안 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밤마다 엄마를 그리며 울다 지쳐잠든다는 것은 일기장을 통해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운동장을 내려다보는데 마침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마다 커다란 은행나무 밑으로 모여드는 아이들과는 달리 멀리 떨어진 구석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그늘로 숨지도 않고 햇볕 아래에 넋이 빠진 채 앉아 있는 모습이 어린 새처럼 안쓰러웠다. 시끌벅적 노는 아이들의 모습만 멍하니 바라볼 뿐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엄마 잃은 아픔이 얼마나 클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날 아이의 일기장에 내 마음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혜*야, 너의 눈을 보고 있으면 맑은 영혼을 가진 천사가 떠오른단다. 너의 엄마가 보내준 천사가 너의 눈망울 속에 살고 있나 봐. 엄마는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너를 지켜보고 계실 거야. 너무 슬퍼하지 말고 용기를 갖자. 그래야 하늘에 계신 엄마도 기뻐하시지 않겠니?>

'그래야 딸을 잃은 네 할머니도 기운을 내서 너를 잘 돌봐주시지 않겠니? '라는 말을 쓰려다 그만두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그 아이 이름을 자주 불러주기 시작했다. 반장한테 간단한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그 아이도 함께 딸려 보냈다. 한 달 정도가 지났을까. 아이한테 아주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업 시간에 생기를 띠며 열심히 참여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먼저 다가가기도 하고, 아이들과 섞여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간간이 들을 수 있는 웃음소리가 무엇보다 나를 기쁘게 했다. 그 모습이 대견하여 빙긋이 웃어 주면 쑥스러운 듯 아이들 등뒤로 얼른 숨어버렸다.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일기를 매일 꾸준히 쓴다는 점이었다. 잠재되어 있는 원초적 슬픔이 자신감으로 승화될 수 있는 글 쓰는 활동이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 다독이며 격려하는 게 나한테 주어진 역할이었다.      


일기장은 아이와 나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와도 같았다. 내가 먼저 건너갈 때도 있었고, 아이가 먼저 나한테 건너올 때도 있었다. 징검다리 덕분으로 많은 고민과 상담이 자연스레 이루어질 수 있었다. 기쁜 일이 있을 때는 함께 웃었고, 마음이 울적할 때는 같이 슬퍼해주었다. 일기장을 통한 징검다리 대화가 그 아이에게는 유일한 채움이 되었고, 나에게는 커다란 보람으로 자리했다.      


6학년이 되어 반이 갈린 이듬해, 복도에서 만난 그 아이가 반갑게 인사했다. 

"선생님, 저의 눈이 천사의 맑은 영혼을 닮았다고 하셨죠?"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짧은 글 한 줄 달아준 것밖에는 없는데 그것을 가슴 깊이 담아두었다는 게 너무나 고마웠다. 내가 뿌려놓은 줄도 모르던 씨앗이 어디선가 싹을 틔워 자라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랑의 씨 뿌리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제자가 중학교로 진학한 후에 처음 보내왔던 편지를 떠올린다.

 <선생님은 저한테 천사의 눈을 닮은 아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죠? 그때 그 말씀 하나에 힘을 얻었습니다. 선생님의 그 정성과 관심에 용기를 찾을 수 있었답니다. 아무 탈 없이 학교생활을 잘하게 해 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뒤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는데도 매년 스승의 날이 되면 어김없이 편지를 보내온다. 여전히 <천사의 눈을 닮은 아이 올림>이라는 끝맺음이 나를 미소 짓게 한다.  

가정의 달이며 신록의 달 오월이 성큼 다가왔다. 제자의 가정에 밝고 건강한 성장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바란다. 내년에 받을 편지에는 오늘보다 더 좋은 소식, 더 기쁜 소식이 가득하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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