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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Aug 19. 2023

겨울밤이 주는 알싸함

눈꽃송이를 밟고 가신 외할아버지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지만 겨울이 주는 알싸함을 잊지 못해서다. 싸늘한 추위와 함께 차곡차곡 쌓이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언제나 내 안에 숨 쉬고 있다. 그것들을 꺼내 볼 때마다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아련함이 스멀스멀 묻어 나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연한 몽롱함이 소름처럼 돋아나기도 한다. 그때의 기분을 나는 알싸함이라 표현하곤 한다. 


오늘같이 눈이 펑펑 내리는 밤은 깊은 상념에 젖어 마음은 어느새 고향 안마당으로 가 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슬슬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외가에는 집안 행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제사나 생신 등 집안의 대소사가 유난히 겨울에 많이 몰려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던 나는 손님이 많이 오는 행사 날을 은근히 기다렸다. 조용하던 집안이 며칠씩이나 떠들썩해지는 그 분위기가 마냥 좋아서 설레기까지 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아도 마음만은 훈훈했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할머니들은 일손을 돕기 위해 안방에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는 동네 아낙들의 종종걸음은 경쾌했다. 양지바른 뒷마당에서 번철에 두부와 전을 부치며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참기름처럼 고소하게 들려왔다. 이따금 한시 외는 소리 말고는 침묵만 흐르던 외증조할아버지가 거처하는 사랑방에서도 두런두런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곰방대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들의 헛기침하는 소리도 마냥 정겨웠다. 건넌방에 모여 소꿉놀이하는 우리는 왁자지껄 신이 났다.


미리 만들어 두었던 연을 헛간에서 꺼내 하늘 높이 날렸다. 들판을 달리다가 지치면 팽이치기나 딱지놀이로 숨을 진정시켰다. 지붕 끝에 매달린 뾰족한 고드름은 순식간에 총이 되었고, 썰매를 타다가 몸이 얼면 부엌으로 냅다 뛰어들기도 했다. 아궁이 앞으로 바짝 다가앉아 코를 박고 있으면 아주머니들은 떡이며 부침개를 입에 물려주면서 얼른 밖으로 쫓기에 바빴다.


온 세상이 칠흑 같은 어둠에 갇혀버려도 나의 오감은 잠들지 않았다. 잠은 저만치로 달아나고 외려 어른들 말씀에 귀를 쫑긋 세웠다. 모든 게 궁금하고 모든 게 설레는데 그 기분을 무슨 수로 잠재울 수 있을까. 

‘내일 아침에는 어떤 손님이 저 대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어설까?’

‘또 어떤 재미난 일들이 펼쳐질까?’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수많은 겨울 추억 중 평생 가슴에 울림을 주는 잊을 수 없는 흑백사진 한 장이 있다. 너른 호수에 갇힌 물이 태양 볕 아래에도 불구하고 꽝꽝 얼어붙은 몹시 추운 날이었다. 고요함이 자욱하게 깔린 그날 밤, 오래도록 병상에 있던 외할아버지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갑작스레 손님들이 하나둘 집안으로 들어섰다. 굳은 표정을 짓는 동네  사람과 멀리 사는 일가친척들이 빠른 걸음으로 문턱을 넘어 들어섰다. 웅성거리는 분위기는 예나 다름없었지만 내 가슴엔 설렘 대신 두려움이 출렁거렸다. 그때 또렷하게 들려온 한마디의 말은 내 가슴을 쓰리고 아프게 했다. 깊은 수렁에 빠져들 듯 정신까지 어질했다.

"오늘 밤을 못 넘기실 것 같아."


고통으로 신음하는 할아버지의 다리를 주무르며 곁을 지켰다. 며칠 전, 망치로 다리를 잘라내 버리고 싶다고 울부짖음으로 호소하던 그 다리였다. 으스름 달빛이 할아버지 방으로 스며들었다. 호탕하면서 인심 좋기로 소문난 외할아버지는 그날 새벽, 끝내 눈을 감으셨다. 사람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여기저기 등잔불 심지에 불을 붙였다. 천지를 진동하던 애도의 울음소리는 잠시였고, 집안은 다시 웅성웅성 잔치 준비로 분주해졌다. 


할아버지가 산으로 떠나시던 날, 새벽부터 내린 눈은 온 세상을 덮어 설국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걷지 않은 새하얀 길을 무작정 걸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눈 위로 하염없이 떨어졌다. 한참을 가다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니 발자국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눈 위에 찍힌 신발 자국으로 동그란 모양의 꽃송이를 만들었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수도 없이 많은 꽃송이를 눈 위에 새겨놓았다.   


은빛 세상에 상여꾼들의 구슬픈 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려 퍼졌다. 상여가 점점 멀어져 갈 때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그나마 위안이었다. 

"후덕한 삶을 사셨으니 분명 극락으로 가셨을 거야.” 


산으로 올라가던 상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만들어 놓은 그 꽃송이를 밟고 떠나셨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꽃송이지만 내 가슴에는 언제나 선연하다. 숭숭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문풍지 하나에 의지하며 견디던 할아버지. 천상에서는 아무런 고통 없이 편안히 잘 지내고 계시려나.


사그랑 사그랑 바람에 떨리는 문풍지 소리가 들려온다. 으스름 달빛 아래 비치는 창밖의 나무 그림자가 생생히 보인다. 나의 오감을 뒤흔들던 그 계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알싸함이 온몸을 휘감아버려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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