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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Aug 24. 2023

밥상을 차린다는 건

서로의 마음을 잇고, 정을 나누는 것

 

  나는 집으로 사람을 부르는 걸 좋아한다. 집에서 만남을 약속하면 머리끝까지 호기심이 발동하면서 괜스레 마음이 둥둥 떠다닌다. 음식 장만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기다림에 부풀어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이 즐겁다. 평소에는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면서도 손님이 온다 생각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펄펄 난다. 서로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친화력은 절로 커질 거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웃음으로 맞이한 손님이 웃음을 가득 안고 떠나갈 때 스스로한테 드는 만족감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요즘은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 친척 간의 모임이나 잔칫날에도 주로 식당에서 치르는 게 보편적인 양상이다. 이런 추세에 따라 각양각색의 외식 문화가 발달하여 한결 쉬운 방식으로 손님을 치를 수가 있다. 초대받은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바깥에서 대접받는 걸 선호하는 듯하다. 


하지만 식당에서 만나 식당에서 헤어질 때는 무언가 무미건조함이 남는다.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채워 볼까 싶어 들어가는 곳이 바로 커피점이다. 거리마다 커피점이 우후죽순처럼 넘쳐나는 게 꼭 그런 이유일 듯하다. 물론 커피 애호가들한테는 손가락질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만약 집으로 초대했더라면 식사가 해결되고, 맛있는 후식까지 제공되니 카페에서 차 주문할 시간이 줄어들지 않겠나. 편안함은 서로에게 주는 덤이 될 수 있다.


친정엄마도 집으로 사람 초대하는 걸 좋아했다. 특히 일가친척 중에 새로 들어온 식구가 있거나 멀리 길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집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했다. 정성껏 차린 밥상으로 새로 들어온 식구를 열렬히 환영한다는 뜻을 표했다. 멀리 길을 떠나는 친척한테는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오기를 비는 정성을 보태서 성심껏 상을 차렸다.


집으로 초대했던 사람들 중 유독 기억나는 분이 있다. 초록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고 수줍은 인사를 하며 들어섰던 외숙모다. 부엌에서 분주하게 서성대던 엄마의 설렘은 두 뺨을 타고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날 저녁, 새 식구를 맞이하느라 준비한 조촐한 저녁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구수한 소고깃국 내음이 부엌을 가득 메웠고, 기름내를 풍기는 전이 상위로 올라왔다. 평소엔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나물 반찬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상 위에 자리를 잡았다. 지극정성으로 채소를 다듬고 데치고 볶으면서 오로지 우리 집안으로 들어온 새 식구만을 생각했을 터다. 


평소에는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을 찾는 게 더 힘든 엄마지만 누군가를 초대해 밥을 해 줄 때면 어디서 그렇게 신바람이 나오는 걸까. 우리 오 남매의 교육을 위해 시작한 장사로 한가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까지 살피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다. 가난한 살림 일구려고 억척스럽게 살면서도 사람에 대한 정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흐르는 분이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적 본 그대로 가풍을 따라 실천하느라 문간을 나서는 손님한테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남의 집을 방문하거나 우리한테 심부름을 보낼 때도 빈손으로 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남한테는 무조건 베풀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진 엄마를 보며 자란 탓인지 우리 남매들도 남 주는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엄마는 이제 손님을 위해서 더 이상 밥상을 차리지 않는다. 아니, 초대할 수가 없다. 당신 잡수실 것도 겨우 할 정도로 연로해졌기에 초대라는 건 아예 엄두를 못 낸다. 만일 초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웬만하면 집으로 불러 대접했으면 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 모양이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일 뿐이다. 그래서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가 있다.

“늙으면 다 소용없어. 몸이 따라주지 않아 사람 노릇을 못 하고 사니 원.”

손님을 불러 밥상 차려주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던 젊은 날이 많이 그리운가 보다. 상차림을 돕던 나에게 들려주던 말씀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밥을 해 먹이는 일은 서로 정을 나누며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잇는다는 뜻이야."


엄마의 젊은 시절은 어느새 멀고 먼 옛날이야기로 흘러가버렸다. 초록 저고리에 빨강 치마를 입고 수줍게 웃던 새색시, 외숙모도 어느덧 일흔을 훌쩍 넘겼으니 더 말해 무엇하리. 엄마의 건강을 살피러 가끔씩 와주는 외숙모의 정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그것조차도 엄마는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한다. 주기에는 익숙하지만 받기에는 낯설게만 살아왔던 습관이 낳은 마음이다.


며칠 뒤, 엄마의 생신날이 돌아오면 온 가족들이 한자리로 모일 테다. 이름난 식당을 찾아 예약할 게 뻔하니 서둘러 제동을 걸어야겠다. 평생 남을 위한 밥상만 차려온 엄마를 위해 이번에는 집에서 차려보자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엄마의 밥상, 기대하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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