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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Sep 21. 2023

지금은 서로 윈윈 해야 할 때

인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

 "이크, 깜짝이야.”

살그마니 발을 들이민다는 것이 그만 거실 귀퉁이로 나동그라졌다. 정교함을 부르짖던 내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다니. 내 사전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나이를 운운한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나마 사방이 어둑어둑해진 것은 다행이었다. 촉각을 곤두세우며 얼른 방향 감각을 찾으려는 순간, 반짝하고 불이 켜졌다. 반사적으로 몸뚱이가 바짝 오그라들었다.

'하필이면 저녁 식사 때라니.'


정신을 차리고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세상에, 여기는 출입금지구역이 아닌가. 우리 가족이 들어와서는 절대로 안 되는 곳이다. 후회가 막급이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일단 발을 들여놨으니 집 구경이나 하면서 천천히 한강 야경도 즐기는 수밖에.


‘저 좀 지나갈게요.’

주인에게 살짝 양해를 구하듯 살금살금 걸음을 뗐다. 여기서부터 소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완전 정면으로 나를 맞닥뜨린 안주인은 냅다 고함을 질러댔다.

“으악!”

하마터면 귀청이 떨어져 나갈 뻔했다.


귀신을 보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건가? 호들갑 한번 요란스러웠다. 벌집을 쑤셔대듯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은 비명에 아저씨가 안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반쯤 열린 방안을 살짝 들여다보니 TV ,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사상 최저점인 0.6으로 떨어졌습니다. 인구 감소가 현실로 다가와 국가의 존망까지 위협하는 실정입니다.”

우리네 입장으로 봐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낱말, ‘인구 감소’라는 말이 낯설게 귓가를 스쳤다.


“어머머머, 어떡해, 어떡해.”

안주인은 연신 깨방정을 떨며 소리를 질러댔다. 아저씨는 잔뜩 경직된 군인처럼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내가 그리도 무서운 존재인가. 헛웃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떡 버티고 서서 나를 내려다보던 아저씨가 갑자기 총을 뽑듯 호기롭게 티슈 한 조각을 뽑아 들었다.


'이크, 저것으로 내 숨통을 조여온다면.'

만만하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아찔한 나머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내 숨이 끊어지고 나면 이내 티슈 조각이 덮인 채, 주검이 되고 말 것이다. 창밖으로 툭 던져지는 그 순간부터 이승과는 영원한 이별이다. 오랜 시간 주워들은 경험으로 보아 자연의 당연한 섭리다. 우리네 삶의 순환이 그럴진대 세상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생명을 건지려면 부리나케 이 자리를 피해야만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동자가 내 몸에 꽂혀버려 다리 하나도 꼼짝할 수 없었다. 그저 내 운명이려니 생각하며 하늘의 뜻에 맡기는 도리밖에.


그동안 참 무던하게 살아온 세월이다. 어둠 속에 몸을 숨겨야 하는 숙명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지만 특별한 육체노동 없이 거저 살아온 걸 감사한다. 비록 인간이 만들어낸 삶의 찌꺼기에 의존하며 의식주를 해결해 왔다지만 그건 우리 종족만의 특권이기에 그 누구한테도 손가락질받기는 싫다.


지구 역사상 최고의 번식률을 자랑하는 우리 가문의 가풍에 따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살아왔다. 지금껏 숱하게 자손을 퍼뜨렸으니 내 할 도리는 다했다고 자부한다. 어려운 고비야 몇 번 있었다 해도 어느 생명체건 죽음이라는 굴레 앞에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은가. 각지에 흩어진 후손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니 이쯤에서 하직 인사를 한다 해도 여한은 없다.


다만 이 밝은 빛만큼은 절대적으로 막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태양 빛을 피해 어둠만 찾아다니는 우리네 삶이 아니더냐. 누구나 존엄사를 택할 권리는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 왔다. 나의 몸뚱이를 만천하에 훤히 드러내놓은 채 임종을 맞이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어둡고 축축한 내 고향 땅에서 자손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는 것이 소원이다. 이렇게 앓지 않고 그저 자는 듯이 눈을 감을 수 있는 것만도 큰 복이라 여기면서.


발까지 구르며 부들부들 떨던 안주인은 어느새 식탁 의자 위로 후다닥 올라섰다. 고함지르는 소리는 여전한데 갑자기 애원하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으악! 죽이지는 마, 제발!”

용감한 군인 아저씨는 나를 덮치려다 말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처음 나를 발견했을 때 질렀던 것보다 몇 곱절은 더 높은 소리가 천장을 뚫었기 때문이다.


'죽이지는 말라고요? 더구나 제발, 이라니요?'

그렇다면 애당초 소리를 지르지 말았어야지요,라는 반발심이 내 고개를 바짝 쳐들게 했다.

아저씨도 두 손을 아래로 툭 떨어뜨리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살생은 하지 말라고!”


때 아닌 난리통에 작은 방문이 열렸다. 반듯하게 잘생긴 이마 한가운데에 '후한 인심의 소유자’라는 딱지를 떡하니 붙인 한 젊은이가 막대기를 들고 나왔다.

"엄마, 아빠! 그냥 놔두세요. 제가 처리할게요.”

와! 우리 종족 사이에 전설적인 인물로 잘 알려진 그 젊은이가 분명했다.

‘옳거니, 지난밤 꿈자리가 길하더니 오늘 운수는 대통이렷다.’


생사의 고비에 놓인 처지도 잠시 잊고, 아들 퀴바가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퀴바는 내 자식 중 호기심이 가장 큰 녀석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어찌나 뛰어난지 남보다 늘 앞장서기를 좋아한다. 매일 습관처럼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맨 꼭대기 층을 정복하고 싶어 안달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허황한 뚝심에 생명을 저당 잡히는 일은 절대 하지 말라며 누누이 타일러왔다.


며칠 전, 숨을 헐떡이며 지하실로 들어온 퀴바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무용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내 말을 흘려듣고는 친구와 함께 모험을 강행했는데 모두 나가떨어지고 저 혼자만 겨우 목적지에 닿았다는 것이다. 생전 처음 고층을 정복한 기쁨을 누리기도 전, 대낮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오늘처럼 일대 소동이 벌어졌음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날 '제가 처리할게요’ 하며 퀴바를 안전하게 탈출시켜 준 그가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까딱하면 내 손으로 자식의 장례를 치를 뻔했으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앞으로 2103호에는 절대 얼씬하지 않기로 그날 했던 맹세를 잊어버리다니, 나이를 들먹이지 않을 수가 없다.


살짝 미소를 보이던 그 젊은이가 갑자기 내 몸 쪽으로 막대기를 겨눴다. 미동조차 못 하고 있던 나는 드디어 죽었구나 싶어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뭐 하고 있어?”

의자 위에서 버티던 안주인의 외마디 소리에 실눈을 떠보니 아직 목숨은 붙어 있었다.


‘휴,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내려치는 줄만 알았던 막대기는 알고 보니 나를 유인하기 위한 생명줄이었다.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그 줄에 얼른 올라타야 하는데 헛발질만 계속해대는 꼴이라니. 몇 번이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는지 모른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안주인은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들, 빨리빨리 좀 해!"

내 목숨은 여기까지로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죽을 때 죽더라도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지 그 이유라도 한번 따져 묻고 싶었다.


막대기를 집어치운 그는 티슈 한 장을 뽑더니 내 앞에 가지런히 펼쳐놓았다. 눈치를 챈 나는 발을 모아 폭신한 티슈 위로 얌전히 올라섰다. 그는 네 귀퉁이를 하나의 꼭짓점으로 모아 균형을 잡더니 살포시 들어 올렸다. 거꾸로 된 낙하산을 타는 느낌이랄까? 하늘로 붕 뜨는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슝!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열린 부엌 창문으로 던져졌다. 수직 낙하하면서 감사의 표시로 윙크를 날렸는데 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퀴바의 목숨을 살려준 그에게 또다시 보시를 받다니, 우리 가문의 크나큰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내 도리라 생각한다. 이 땅에 나올 때 가지고 온 재주를 그에게 한 수 가르쳐주고 싶어도 아직은 미혼이라는 게 걸린다. 언제 내 훈수가 빛을 발하게 될지 상상을 하는 사이 나는 풀밭 위로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0.6이라는 출산율로는 나라의 미래가 위태롭다고 아우성치는 통에 나도 요즘 밤잠을 설치곤 한다. 인간들이 잘 먹고, 잘 살아야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으니 당연한 걱정 아닌가. 우리 종족의 탄탄대로를 위해서는 ‘인구 증가’가 필수조건이다. 어차피 생사를 함께하는 지구별에서 우리한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서로가 윈윈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손을 잡고 머리를 맞댄다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생길지 모를 일이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무엇이든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 2103호 젊은이한테 하루빨리 결혼 소식이 있기를 바란다. 나는 그날을 위해 번식의 노하우를 전수할 계획이나 치밀하게 짜두련다. 이 한 몸 던져 인류 발전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려는 진심을 과연 이해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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