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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Nov 28. 2023

아내의 딴 주머니

endless love

  아까부터 창밖으로 꽂혀버린 시선이 풀을 발라놓은 듯 착 달라어 떨어질 줄 모른다. 이틀째 계속되는 답답한 심정을 달래주려는 듯 굵은 소낙비가 폭포수처럼 시원하게 쏟아진다. 엊그제 들은 후배의 말이 귓가 윙윙거더니 머릿속까지 헤집 들어다.

"아니, 자네는 왜 아내에게 경제권을 안 넘겨주고 골치를 앓는 건가?"

"골치라뇨? 선배님도 참. 가계 운영을 철저히 해보자는 거죠."

"여자가 알아서 좀 잘할까 봐 그러나?"

"그런 말씀 마십쇼. 요즘 세상에 여자를 믿어요?"

"나참, 아내를 못 믿으면 누굴 믿나?"


신세대를 자처하는 후배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믿지 못할 여자와 결혼은 왜 했을꼬. 게다가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절약해 봤자 얼마나 모은다 살림에 신경 쓰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 잔한 사내 같으니라고.


아내가 나 모르게 딴 주머니를 찬다고 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틀 전이다. 장모님 생신을 맞아 가족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였다. 분양받은 우리 아파트로 화제가 이어지면서 장모님이 내게 물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마지막 잔금 2회분을 남겨두었다는 내 말끝나기가 무섭게 처제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형부, 걱정 마세요. 언니가 돈 좀 모아놨을 거예요."

"그려, 걱정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 생기겄나?"

애써 웃음을 보이던 장모님이 처제한테 눈을 꿈벅하더니 이내 등을 돌리며 어신호를 보다.

"엄마, 언니가 돈 천만 원이나..."

장모님이 처제의 옆구리를 꾹 찌르는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태연한 척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가 부엌에서 나오더니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식사하는 내내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쳐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한두 푼도 아니고 그 많은 돈을 나 몰래 어떻게 마련했다는 건.


10시가 조금 넘어서 자는 애 하나는 아내가 업고, 큰 애는 내가 들춰 업었다. 배웅하는 처가 식구들의 끌끌 혀 차는 소리가 내 뒤통수 정없이 두들겼다.

"빨리 차를 하나 사야지, 원."

면허증은 진작에 따 놨어도 박봉이라 어느 세월에 차를 굴리게 될지 모를 일이다. 굳이 차가 절실하지는 않아도 이렇게 가족 모임이 있을 때는 게 느껴진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머릿속은 이미 거미줄처럼 얽혀서 복잡해졌다. 오늘 당장 정면으로 부딪쳐볼까? 아니야, 설마 그럴 리 없어. 늘은 슬쩍 말을 돌려서 분위기나 떠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샤워를 끝내고 들어오는 아내에게 슬며시 말을 건넸다.

"아파트 잔금은 어떻게 하지?"

"글쎄요."

"당신, 돈 좀 모아둔 것 있나?"

조심스레 아내의 안색을 살피던 내게 아내는 발끈하며 쏘아붙였다.

"아니, 당신! 내가 당신 모르게 딴 주머니라도 차는 줄 알아요?"

요것 봐라, 예로부터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했겠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화를 낼 사람은 바로 나라고. 어디서 큰소리를 치는 거냐고, 지금.      


잠자리에 든 아내를 옆에 두고 밤새 끙끙대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새 부리로 콕콕 쪼아대듯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에 잠이 올 리 없었다. 결혼한 지 올해로 7년째다. 그동안 빈틈없이 살림을 잘해와서 철석같이 믿었던 아내다. 부모님 도움을 뿌리치고 오로지 우리  힘으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자던 그 맹세는 어디로 갔나. 요령 많고 돈 많이 버는 다른 남편들처럼 호강도 제대로 못 시켜 주어 늘 미안했었는데. 햇볕 들지 않는 빌라에서 아들딸 낳아 잘 길러 주는 아내에게 늘 감사하 살아왔다. 그런 아내에 대한 신뢰감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제라도 그만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하는 걸까. 그렇다면 보석처럼 빛나는 눈망울을 굴리는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 생각은 생각을 낳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에 온몸으로 오돌토돌 소름이 돋아났다. 양처럼 온순한 얼굴을 한 여자, 항상 웃음으로 나를 위해주던 아내였다. 평소 몸에 밴 검소한 생활은 나를 속이기 위한 행동이었을까. 돈 얘기가 나올 적마다 엄살을 떨더니 도대체 그 많은 돈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이제야 어젯밤 일이 났다. 전화기 속의 낯선 남자 목소리 누구냐고 물었더니 흠칫 놀랐었지. 아내는 지금 얼마나 나를 한심한 놈으로 여기며 혼자 웃고 있을까. 초조 불안한 마음에 반미치광이처럼 머리털만 쥐어뜯고 있자니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못 믿을 게 여자라는 후배 말이 맞는 걸까. 남편을 기만한 아내와 맞딱들이는 게 두려워 오늘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일찌감치 회사로 내뺐다.

"대리님, 퇴근 안 하세요?"

고개를 들어보니 퇴근을 서두르는 직원들이 하나둘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고 하는 중이었다. 비도 오고 기분도 울적하니 한 잔 걸치자는 내 말에 후배는 냉랭하게 거절했다.

"오늘은 가시장에 나가 배추 시세나 좀 알아봐야겠어요. “

쫀쫀하신 사내양반님이여! 가계 운영하느라 꽤 바쁘걸? 그러다가 벼락부자라도 되시겠군. 배배 꼬인 말투 그대로 툭 내뱉고 싶었지만 속으로 꿀꺽 삼켜버렸다.     


우산을 펼쳐 들고 거리로 나왔다. 자동차들이 날쌘 제비처럼 찍찍 물을 튕기며 매끄럽게 달려갔다. 어디로 갈 것인가? 비가 그칠 듯해서 우산을 접고 정류장에 멍하니 서 있었다.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은 방랑자 신세가 되었으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아내는 오늘 아침, 출근하는 내게 일찍 들어오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래, 끙끙 앓지만 말고 흥부가 박을 타듯 한번 터뜨려보자. 피하지만 말고 정면에서 따져 자. 꼼짝도 못 하고 붉은 석류 빛으로 변해가는 그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두마.


버스를 기다리기에는 마음에 조급증이 커서 얼른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은 차 문을 채 닫기도 전에 뉴스에서 들었다는 이야기를 주욱 늘어놓기 시작했다.

"육군 장성이던 남편이 죽고 나서 부조금으로 들어온 돈을 놓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대판 싸움 했다지 뭡니까.”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고 신이 났는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세상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상대로 고소까지 해서 재판장에 서게 된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여자의 속성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내게 이처럼 확실한 단서를 알려주는 사람이 하니 나타 줄은 미처 몰랐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으로 들어서니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날이 활짝 개었다. 골목에 들어서서 먼발치로 우리 집을 올려다보는데 한숨부터 나왔다. 3층짜리 빌라 앞에 세워진 못 보던 하얀 자동차가 나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아니, 누가 남의 집 대문 앞에 차를 세워놨지? 고개를 들어 이 집 저 집 쏘아보는데 2층에서 내려다보던 아내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마 베란다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모양이다.

"여보, 일찍 왔군요. 잠깐만요."

아내는 후다닥 뛰어 내려와 나를 안을 듯 가까이 다가섰다.

"어때요? 이 차?"

”남의 차가 좋으면 뭐 하고 나쁘면 뭔 상관이야?"

차를 흘깃 훔쳐보면서 가시 돋친 핀잔을 날카롭게 뱉어냈다.


며칠간 계속되었던 부부간의 냉전을 잊기라도 한 듯 아내는 애교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감정은 삐딱하게 곤두서서 풀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그런 나를 무시한 채 팔짱을 끼며 내 눈앞에 조그마한 주먹을 쫙 펴 보였다.

"자요!"

내 손바닥 위로 올라온 금속성 소리를 낸 것은 다름 아닌 자동차 열쇠였다. 깜짝 놀라는 내 눈빛을 따라 아내는 조분조분 말했다.

"색깔. 맘에 들어요?"

놀라움 반, 수치심 반으로 정신은 이미 몽롱해져 몸조차 가누기 어려워졌다.

"미안해요, 그동안 당신 모르게 딴 주머니 차서..."


아내에 이끌려 현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실내에 흐르는 익숙한 음악이 아주 잔잔하게 나의 가슴을 후벼 팠기 때문이다. 식탁 위에 놓인 케이크와 샴페인을 보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마다 특별한 날이면 볼 수 있었던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불신으로 똘똘 뭉쳐있던 의식들이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했다.

맞다. 오늘은 우리의 7주년 결혼기념일. 아내는 늘 입버릇처럼 결혼 7주년에는 여봐란듯이 차 한 대 뽑자고 말했었지.

케이크에 꽂힌 7개의 초에 불을 붙이고 있는 아내를 낚아채듯 와락 끌어안았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두 아이의 눈이 둥그레지면서 해죽 웃는다. 아이들에게 윙크를 찡긋 날린 뒤, 아내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당신을 사랑하겠노라, 죽을 때까지. 아니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하겠노라.“

아내를 처음 만났던 그 음악실에서 함께 듣던 ‘엔들리스 러브’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부드러운 리듬 속으로 아내와 나는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my endless love, endles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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