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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Nov 25. 2023

거짓말이라도 좋아요

웃는 얼굴은 에쁘다

   마로니에공원의 커다란 나무 밑에 여자아이 둘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 비둘기 모이를 주는 일에 열중하면서도 입은 쉴 새 없이 조잘댄다. 그들 중 한 아이가 눈에 띄게 예쁘다. 날렵한 콧날, 서글서글한 눈매에 도톰한 이마까지 서구형 미인의 조건을 다 갖췄다. 게다가 표정까지 부드러워 누구라도 다시 한번 쳐다보고 싶은 매력 있는 얼굴이다. 그에 비해 다른 아이는 지극히 평범하다. 꾹 다문 입술에 붙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묵묵함이 숨어 있다.


예쁜 아이한테는 덕담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한 아이만 추켜세우면 안 되겠기에 멈칫한다. 두 아이한테 공통으로 어울리는 게 뭘까 잠시 머뭇대다가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너희들, 참 예쁜 아이들이구나.”

  얼굴이 예쁜 아이는 물론, 다른 아이도 금세 웃는 표정을 짓더니 정신없이 비둘기 뒤를 졸졸 따라갔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거짓말이 두 아이를 활짝 웃게 해 준 것 같아 기분이 뿌듯했다.


사춘기 중학생 시절, 조선 토박이 외모를 가진 나와는 달리 조각상처럼 예쁘게 생긴 짝꿍이 있었다. 우리는 교무실 심부름을 담당하면서부터 단짝 사이가 되었다. 교무실을 드나드는 일은 학교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총각 영어 선생님을 합법적으로 볼 수 있는 특혜였다.

  ‘우리 이쁜이들 왔구나.’

  교무실 문을 열 때마다 영어 선생님이 고개를 들며 반갑게 아는 체를 해주어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듣던 ‘우리 이쁜이들’이 갑자기 ‘우리 이쁜이’로 들리는 게 아닌가. 순간, 내 귀를 의심했으나 분명히 ‘들’이 빠진 ‘이쁜이’라는 말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선생님의 눈에는 애초부터 예쁜 친구 한 사람만 보고 있던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마냥 우쭐했던 나는 완전 숙맥 천치 바보 같은 여학생이었다. 생기발랄했던 나는 그날, 천 길 낭떠러지로 끝없이 추락하면서 의기소침이라는 끈을 잡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뇌는 똑똑하지 않다고 한다. 우리의 뇌는 말하는 대로, 들리는 대로 무조건 믿어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거짓말조차도 따지거나 거르는 재주가 없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보 같은 뇌 ’라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만일 그때  ‘우리 이쁜이들’이라고 거짓말을 해주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말을 곧이들은 나의 바보 같은 뇌는 정말인 줄 알고 더욱 예뻐지기 위해 노력했을지 모른다. 설령 거짓인 줄 알아차렸다 해도 어떻게든 기대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그 예민했던 사춘기에 적어도 외모로 인해 밤잠을 설친다거나 차별로 인해 주눅 드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학생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 착한 거짓말을 해주었더라면 사려 깊은 선생님 덕분으로 인생이 선순환으로 더 잘 풀렸을 것 같다.


비단 사춘기뿐만이 아니라 외모에 대한 솔직한 평가는 수시로 나를 따라다녔다. 결혼을 앞두고 시댁에 인사하러 갔을 때, 일가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시어머님이 당숙모한테 물었다.

  “색시감 인물이 어떤지 말들 좀 혀 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쑥스럽게 앉아 있는 내 가슴팍 위로 화살촉 같은 한 줄 평가가 내리꽂혔다.

  “형님, 우리 한 씨 문중에 별스러운 인물 가진 며느리가 있나요?”

  포장되지 않은 솔직한 답변은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 색시감의 심장을 정확하게 명중시키고 말았다.


결혼하여 아이 둘을 기르고 있을 때, 또다시 인물을 평가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남편 동창 몇 가족과 식사 모임을 하는데 한 친구가 슬며시 남편한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외모를 보고 결혼했는데 후회될 때가 참 많아.”

  바짝 호기심이 생긴 나는 남편 옆에 찰싹 붙어서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외모보다 심성을 보고 결혼한 네가 부럽다.”

  처음에는 자기 부인의 외모를 자랑하는 말로 들렸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를 겨냥한 화살촉임은 분명한데 칭찬인지 비난인지는 알쏭달쏭했다. 이상 기류가 흐르는 걸 감지한 눈치 빠른 한 부인이 얼른 끼어들면서 나무랐다.


외모를 운운할 적마다 내 가슴은 이미 잘 단련된 과녁판이었기에 특별한 통증 없이 당당한데 오히려 다른 부인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심성이 좋은 여자로 낙인이 찍혀버린 그날, 나의 뇌는 어김없이 그 말을 철석같이 믿어버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착하게 살자. 왜냐고? 나는 심성이 좋은 사람이니까.’

  뇌에 깊숙이 박힌 그 말에 따라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꾹 참고 견디며 오늘까지 이르렀다.


외모가 다가 아니라는 야무진 생각에 미를 보는 잣대도 달라지는 나이가 되었다. 수수한 외모라도 웃음 지으면 예뻐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매끈하게 잘 가꿔진 얼굴도 좋으나 포근한 웃음을 지니면 더욱 예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웃는 얼굴은 성형으로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염치없이 바라기도 한다. 나를 만난 누구라도 내게 이런 말을 건네주었으면 하고.

  “어머나, 얼굴에 항상 웃음이 가득하네요.”

그 말을 들은 나의 뇌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게 함박웃음을 선사해 줄 것이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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