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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Dec 11. 2023

첫 월급을 통째로 시부모님께

귀염 받는 며느리가 되는 비법

  결혼할 당시에 엄마는 시부모님께 잘하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시부모님께 잘해라. 나한테는 시부모님한테 하는 것에 십분지 일만 해도 돼. 안 해도 되고."

나는 엄마 말 잘 듣는 효녀였나, 바보였나. 평생 욕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엄마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여 그대로 따랐으니. 죽으면 바다에 묻어달라는 엄마개구리 말을 듣고 정말 바다에 묻어준 청개구리의 어리석음과 다를 바 없다.


엄마의 '시에 잘하라'는 말은 결혼 전부터 나를 꾸준히 세뇌시켰다. 그래서였을까? 결혼하기 전, 한 미장원에 앉아 잡지책을 들춰보다가 '귀염 받는 새댁이 되는 법'이라는 글 앞에서 눈을 크게 떴다. 결혼을 앞둔 나한테 아주 딱 맞는 글이라서 읽고 또 읽으면서 빨간 색연필로 줄까지 쫙 그었다. 혼자만 알아낸 엄청난 비법 소리 없이 가슴에 깊이 묻어두었다.

 

결혼하고 첫 월급은 통째로 시부모님께 드려라.

그 이유는 결혼 전에는 아들 월급을 관리했을 텐데 결혼과 동시에 며느리한테 옮겨갈 경우, 

그 서운한 감정을 채워드리면 평생 귀염을 받을 수 있다.


결혼을 하자마자 이 비법 빨리 실행에 옮기고 싶어 안달하며 월급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시부모님의  귀여움을 빨리 독차지하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쳤기 때문이다. 내 월급날은 17일, 남편은 20일. 결혼을 11월 말에 했으니 결혼 후 첫 월급은 12월 치가 된다. 12월 봉급이라 함은 보너스가 있는 달이라서 1년 중 월급이 가장 많 달이 아닌가. 액수가 크면 귀도 배가 되겠지 하는 지점까지 생각이 미치자 혼자 있어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잡지의 내용으로 봐서는 남편의 월급만 언급한 것일 텐데 나는 내 월급까지 드려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귀염을 두 배로 받고 싶은 충동에서다. 남편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반대했지만 조분조분 설득한 끝에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12월 17일에 받은 월급봉투를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었다가 20일에 나온 남편의 두한 봉투를 이 층으로 포갰다. 백 원짜리 동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받은 액수 그대로였다. 봉투 바깥에 떡하니 찍혀 있던 명세표 위로 본봉을 비롯해서 수당, 보너스 등 여러 항목에 펜으로 써 놓은 숫자가 보였다. 두 손으로 최대한 공손하게  층 봉투를 내밀자 시부모님은 깜짝 놀라셨다.

"어머님, 아버님! 결혼하고 나서 첫 월급은 부모님께 드려야 한대요."

시부모님은 받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치셨다.

드디어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잡지에서 읽었던 비법의 문구를 끄집어낼 상황이 온 것이

"지금까지는 아들 월급을 받아오셨을 텐데요, 앞으로는 못 받으시니 얼마나 섭섭하시겠어요. 그러니 마지막으로 꼭 받아주세요."

나의 간곡한 부탁에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우리는 얘 월급이 얼마인 줄도 모른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나는 월급 나오는 날 무조건 엄마한테 봉투를 갖다 드렸는데 은행 다니는 이 사람은 한 번도 부모님께 안 드렸다고? 하지만 한번 빼어 든 칼을 도로 집어넣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꾸만 싫다고 하시는 분들께 억지로 봉투를 안겨드리는 순간, 나는 이미 귀염 받는 며느리가  된듯 착각을 하기 시다.

시부모님은 억지로 주니까 받기는 한다만 실제로는 받기 싫다는 듯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탁자 위에 봉투를 그냥 올려놓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못 이기는 체하며 슬쩍 받아 챙겼어야 하는 건데 왜 죽자 살자 부모님께 안겨드을까. 그런 중대한 일을 왜 어쩌자고 똑똑한 동생들이나 친구한테 의논 한번 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을까. 다른 일에는 늑장으로 미적대면서 미련 곰탱이 같은 짓에는 적극적으로 나섰는지.


그렇다면 첫 월급을 시부모님께 드리고 나서 귀염이 바로 시작되었을까? 월급봉투와 장손이자 큰 며느리 귀염 아무 상관 관계가 없었다. 귀염과는 전혀 거리가 먼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내 바탕으로 한 마음고생이 더 많았다.

 신혼생활 시작하자마자 군대 제대한 큰 시동생이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아들을 낳고 얼마 안 있어 작은 시동생까지 군대를 제대하고 들어와 식 구는 다섯으로 늘었다. 그 사이 딸이 태어나면서 여섯 식구로 늘어났지만 내 할일에는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두 시동생과 함께 좁은 다세대에서 직장을 다녔고 아이 둘을 키웠다. 남자는 집안일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한 삼 형제를 위해 일요일은 점심까지 챙겨야 했다. 하루 쉬는 날, 나는 3시 세끼 식사 준비에 두 아이 돌봐야지, 빨래하고 세 남자 와이셔츠 다리느 휴식은 없었다. 몸으로 뛰면서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힘들지 않았던 것은 귀염 받겠다는 지속적인 목표를 놓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터.


귀엽게 생긴 외모도 아니고, 여시같이 싹싹하지도 않고, 묵묵해서 애교랑은 거리가 멀어 오로지 진실 하나로만 살아온 나. 첫째 며느리는 애초에 귀염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점잖은 태도로 매사에 신중해야 하고 무슨 일이든 솔선수범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임무는 어떠한 상황에도 시댁을 위해 희생과 봉사가 체득화된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십 년이 넘도록 희생과 헌신을 다 했지만 돌아온 건 당연한 일이었지, 귀염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일에 심드렁해지면서 스스로 자포자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헛된 꿈에서 깨어나 그저 남들과 같은 평범한 며느리가 되기로 작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봉투에 찍힌 그대로를 시부모님께 드렸던 것이 내 인생 최대 실수였던 것 같다. 일 년 중 가장 많이 받는 12월의 월급을 보시고는 매달 그렇게 받는 것으로 아셨을 게 분명했다. 보너스가 보태진 12월 월급 명세표에 적힌 액수를 보신 시골 분들 생각에는 앞으로 도움이 필요 없을 것으로 단정 지었던 것 같다. 둘째 며느리가 들어올 때는 24평 아파트를 전세로 구해주었고, 셋째 며느리한테는 32평 아파트를 사주신 걸로 그 이유는 충분하다. 우리는 여전히 어두컴컴하고 물이 줄줄 새는 다세대에서 몇 년째 두 아이와 함께 햇빛을 갈구하며 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시부모님이 한사코 안 받겠다고 봉투를 물리시던 그때, 나는 알아차렸어야 했다. 시집을 보내기 전에는 꼬박꼬박 받던 딸의 월급봉투를 더 이상 받지 못해 서운해하실 분들은 바로 우리 친정부모님이었다는 걸. 그때 남편을 잘 설득하여 그 첫 월급봉투를 친정부모님께 내놓았더라면 얼마나 흐뭇했을까. 나는 얼마나 기특한 딸이 되었을까.

"엄마, 이게 마지막으로 드리는 월급이에요."

그랬더라면 내 마음이 이토록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친정부모님은 시집간 딸한테 월급봉투를 통째로 덥석 받을 만큼 경우 없는 분들이 아니다. 어떻게든 딸자식이 잘 사는 모습 보는 게 인생 최고의 낙이라 여기는 분들이다. 그렇게 몰인정하게 월급봉투를 싹둑 끊어냈던 이 불효녀한테 아무 야속함도 없이 끊임없이 아끼지 않고 지속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직장 편안하게 다니라며 내 두 아이까지 키워 주면서도 특정한 대가를 받지 않았으니 말 대로 무료 봉사하셨다. 직장 갔다 오면 일에 치일 줄 뻔히 알고 시동생들 위해 반찬까지 챙겨준 친정부모님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혹시 우리 친정부모님의 은공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람의 탈을 쓴 금수와 같다는 과격한 표현을 해도 결코 틀린 말 아니다.


오늘밤 유난히 엄마와 아버지가 보고 싶은 날이다. 낮에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을 준비해서 함께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고 왔는데도 자꾸만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웃음 띤 얼굴로 좋은 말씀만 가려해 주시는 우리 엄마. 나는 '좋은 엄마를 유한 사람'이라고 여기저기 아무리 자랑하고 다녀도 충분치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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