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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Dec 19. 2023

나를 위한 선물

치장 대신 입으로 먹은 보석

 

  시끌벅적한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모퉁이를 돌자 좌판 위에 수북하게 쌓인 커다란 석류들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주인아저씨가 검붉은 석류 하나를 들어 반으로 쫙 갈랐다. 빛을 뿜어내며 우수수 쏟아지는 영롱한 알맹이들. 속살이 마치 자수정처럼 맑고 투명하다. 여행지의 보석상가에서 보았던 그 모양, 그 빛깔처럼 마냥 곱다. 석류의 매혹적인 유혹에 못 이긴 나는 이미 발길을 멈추어 섰다. 

 

사철 흔하게 나오는 것이 아닌, 딱 이맘때만 볼 수 있는 것이라 더욱 특별하다. 문득 신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식구들이 생각났다. 살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 결정했다. 오늘은 단맛보다 신맛을 즐기는 내 입맛에 초점을 맞춰보자고. 


얼마 전, 강연장에서 들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를 위한 힐링’이라는 주제로 시작한 강연에는 많은 청중이 참석했다. 주부들로부터 인기를 얻으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한 강사는 청중에게 물으며 마이크를 돌렸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선물을 해본 적이 있나요?” 

이 질문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선물은 내가 남에게 주는 기쁨이고, 남에게 받아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특별한 날에 상대로부터 받는 게 선물이지, 스스로한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내가 나를 소중하게 여겨야 다른 사람도 나를 귀하게 여깁니다.”

강사의 의미심장한 말 하나하나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소중한 자신을 아껴주는 기본 조건은 지친 일상을 달래주라 한다. 자신에게 스스로 선물을 함으로써 피로가 회복되고, 자존감까지 길러질 수 있다는 말에 공감했다. 남한테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을 챙겨주라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대부분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생활 속에서 자신을 위해 특별히 선물할 기회를 주는 사람이 얼마나 되랴.


나이가 들수록 몸은 예전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 일은 줄어들지 않는다. 특히 갱년기에 접어드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겨워지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은근히 가족의 관심을 받고 싶고, 이유 없는 우울도 함께 오는 시기이다. 그동안 사춘기의 자녀를 잘 다독여 성장시켰으니 주부의 갱년기도 관심받을 자격은 있다. 몸이 아파 죽을 만큼 심하게 갱년기를 앓는 사람도 여럿 보았으니 쉽게 넘겨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 마음의 위안을 주면서 갱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콧날이 시큰해졌다.


지난번에 만난 친구는 스스로한테 선물했다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생일 하루 전날까지도 식구 중 어느 한 명도 엄마의 생일을 모르고 있었다니, 무심한 남편에게 이제는 선물 좀 받고 싶다면서 옆구리를 쿡 찔렀더니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음껏 사 와.”


홧김에 백화점으로 얼른 달려가 값비싼 겨울용 외투를 샀다면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네가 자작극을 꾸민 거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친구와 나는 한참 동안 잇몸이 보이도록 꺼이꺼이 웃어댔다. 


자신을 위해 틈틈이 선물을 해보라는 강사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뱅뱅거린다. 요즘 따라 몸이 무겁고 나른해 드디어 나도 힐링할 때가 왔다는 생각도 든다. 바로 오늘이 그날인가. 이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제철 석류는 구할 수 없으니. 얼른 바구니 안에 크고 실한 것을 골라 담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찬장에서 예쁜 문양의 커다란 접시를 꺼냈다. 귀한 손님한테 대접하는 양, 식탁에 테이블보를 깔고 하얀 접시를 올려놓았다. 반으로 자르니 역시 알알이 투명한 보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잘 익어 붉은빛이 선명한 과즙이 뚝뚝 떨어진다. 


석류는 천연 식물성 에스트로겐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 갱년기에 좋다. 오죽하면 ‘신이 여자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극찬했을까. 갱년기를 조금이나마 슬기롭게 이겨내려는 나의 바람을 보석처럼 빛나는 석류 알맹이가 과연 이루어 줄 것인가. 

“이것은 나를 위한 선물입니다.” 


언제나 가족을 먼저 챙기는 엄마의 모습을 익히 봐왔던 터라 식구들은 의아해한다. 나는 식구들 표정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태연하게 대처했다. 낱개로 한 알 한 알 떼어내지 않고 그냥 덩어리째로 입에 넣었다. 새콤하고 달콤한 즙이 입안으로 가득 고였다. 우적우적 석류를 씹는 내내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얼굴빛처럼 이내 몸이 반응하는 듯했다. 몸을 치장하는 보석 대신 입으로 먹을 수 있는 커다란 보석을 금세 혼자 다 먹어치웠다. 


나 자신을 위해 가끔 이 정도의 선물쯤이야. 아니, 가끔이 아니라 매일 해주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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