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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정연 Jan 09. 2019

자전거를 잡아주는 아버지

어린 시절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뒤에서 잡아주는 아버지가 계셨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잡아주니까 우리는 안심하고 페달을 밟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페달을 밟으면서도 겁이 생겨 무서웠다. 뒤를 쳐다보며 큰소리로 외친다.

“아빠! 자전거 잘 잡고 있지? 놓으면 안 돼!.”

“아빠가 잘 잡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앞만 봐. 핸들 꽉 잡고 페달만 굴려!”

속도가 서서히 붙으면서 아버지는 자전거와 맞춰 달릴 수 없기에 우리가 모르게 놓아버린다. 자전거를 놓아주고 나서 아버지는 가만히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까? 아니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뒤를 열심히 뛰면서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지켜본다. 우리가 다시 한번 ‘자전거를 잘 잡고 있는지?’ 물어보면 아버지는 거짓말로 ‘잘 잡고 있으니 핸들 꽉 잡고 앞만 봐’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러다 자전거가 순간 휘청거리며 넘어질 것 같으면 아버지는 잽싸게 자전거를 잡아주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자전거 페달을 밟도록 응원하셨다.

만약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가 페달을 밟지 않고 앞을 보지 않거나, 핸들을 꽉 잡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뒤에서 잡아준다 해도 소용이 없다. 자전거를 배우기 위해서 페달을 밝고 앞으로 달리려고 노력할 때 아버지의 존재가 뚜렷하다.

아버지는 이처럼 우리의 정신적인 성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신 조언들과 본들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있어 고민이 있을 때 종종 아버지께 털어놓아 해답을 찾는 경우도 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정신적 지주와 같다.

우리를 버티게 해주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또 따른 아버지가 존재한다. 바로 ‘꿈’이다. 아버지도 품사로 명사이며, 꿈 역시 명사(名詞)다. 학창시절에 우리는 명사의 종류에 대해서 지겹게 들었을 것이다. 고유명사, 보통명사, 추상명사 등등……. 그런데 이런 다양한 명사들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꿈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 존재를 잊게 된다면 우리는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는 아버지의 역할을 망각하는 것이다. 자전거를 한 번에 잘 탈 수가 없어 뒤에서 잡아주는 아버지가 있기에 우리는 자전거를 여러 번 시도 끝에 혼자서도 잘 탈 수 있다. 꿈도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자신이 나아가는 길에서 실패와 어려움을 마주하게 될 때 꿈은 우리가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법과 길을 알려준다.

하지만 꿈이 확실하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다. 페달 즉 뭔가 움직임이 있어야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뚜렷해진다. 아이가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휘청거릴 때 아버지가 재빨리 잡아 다시 앞으로 향하도록 도와주듯이 목표가 있고 행동이 따른다면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아버지와 같은 꿈이 재빨리 잡아 다시 한번 앞으로 향하도록 돕는다.

첫 번째로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 항상 목적지를 정한다. 어디까지 달릴 것인지를 정해야 우리는 방황하지 않고 똑바로 가게 된다. 목표가 정해지지 않는다면 페달을 밟을 의미도 없고 더구나 ‘왜’ 내가 페달을 밟아야 하는지 의심을 하게 된다. 목표를 정할 때는 반드시 ‘왜’ 그 목표를 이루고 싶은지 알아야 한다.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 그리고 내가 ‘왜’ 공부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방황하지 않는다. 그래서 목표를 정할 때는 자신이 하고 싶은 우선순위를 생각한 다음 ‘왜’ 내가 그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확실히 정해야 한다. 학생들의 생활기록부 ‘진로희망’ 칸에 고1부터 고3 때까지 꿈이 각기 다른 꿈을 작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학생들에게 왜 꿈이 변하게 되었는지 물어보면 단지 막연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작성했다고 말한다. 반면 한결같은 진로희망을 작성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런 학생들과 이야기해보면 자신이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뚜렷하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어려움을 만나도 자신이 ‘왜’ 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면서 일을 이루어 나간다. 단지하고 싶어서 그리고 관심이 있다는 이유로 목표를 정해서는 안 된다. 내가 그것을 ‘왜’ 하고 싶은지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앞만 바라봐야 한다.

자전거를 탈 때 우리의 시야는 목적지와 함께 바로 앞을 보며 페달을 밟는다. 뒤를 보면서 자전거를 배운 사람은 없다. 앞을 본다는 것은 확신에 찬 의미가 있다. 자신이 없다면 앞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옆을 보면서 페달을 서서히 굴리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목표가 정해졌다면 그 목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앞을 바라볼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과거 속에 갇혀 사는 경우가 있다. 그 과거가 부럽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한다. 현재 입장에서 과거에 자기가 이룩한 것들이 커 보인다면 우리는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과거가 현재와 비교해 작아 보일 때 우리는 과거보다 더 성장하였고 더 앞으로 바라보게 된다. 과거가 커 보이고 그때가 그립다면 자신은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장이 과거에 멈춘 것이다.

세 번째로 핸들을 꽉 잡아야 한다.

앞을 보고 페달을 열심히 굴린다고 해도 핸들을 꽉 잡지 못한다면 목적지와 다른 방향으로 조금 가다가 결국 넘어지고 만다. 핸들을 꽉 잡을 때 우리는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음이라는 핸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노력하고 앞을 바라본다 해도 우리 마음이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결국은 넘어지는 자전거와 같다. 마음은 우리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마음을 종종 ‘속사람’이라고 부른다. 앞을 향해 달릴 때 마음이 방황하게 되면 먼저 목적지에 왜 도착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면서 앞에 어려움이 닥치게 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목표를 의심하면서 결국 마음은 방황이 이끈 대로 포기하고 만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바로 네 번째 방법에 있다.

바로 페달을 밟아야 한다.

페달을 밟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더구나 앞을 보고 핸들을 꽉 잡고 있어도 바로 넘어지고 만다.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기에 자전거의 두 바퀴는 균형을 잡고 달릴 수 있는 것이다. 페달은 우리의 실행과 같다. 더구나 자신의 꿈을 향해 실행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른 마음을 품게 되는 경우는 시간이 많고 할 일이 없어서 빈둥빈둥 시간을 보낼 때 생기게 된다. 하지만 바쁘게 보내고 꿈을 점검하며 앞을 바라본다면 우리 마음은 다른 마음이 생길 틈을 주지 않는다. 오르막길에서는 페달을 더 힘들게 밟고 내리막길에서는 페달을 잠시 멈추어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우리의 실행능력도 마찬가지다. 어렵고 힘든 일은 하루 중에 컨디션이 좋을 때 실행하고, 좋지 않을 때는 가벼운 일이나 혹은 잠과 같은 휴식을 취해주는 것이 좋다. 페달을 열심히 밟을 때 자신의 꿈에 대해서는 절대로 의심해서 안 된다.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할 때 시간을 알차게 사용하면서 시험공부에 매진한 학생들은 오직 자기가 설정한 목표 등급만 생각한다.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하지만 시험공부를 여유 있게 공부하고 설령 공부한다고 해도 책만 펴고 멍하니 있는 학생들이 있다. 이런 학생들은 자신이 공부한다고 해서 원하는 등급이 나올지 의심부터 하기 시작한다. 시도해도 안 되면 왜 해야 하는지 의심의 싹이 트면서 결국은 자신의 의심대로 시험결과가 나온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아버지와 같은 ‘꿈’이라는 존재를 믿어야 한다.

다시 언급하지만 꿈이란 확실히 존재하는 ‘명사’다. 자전거를 타면서 뒤에서 잡아주는 아버지를 믿지 못한다면 페달을 밟고 있는 우리의 발은 떨면서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페달을 자신 있게 밟으면서 나아간다. 꿈을 확실히 이룰 수 있을 것인지 내가 과연 그 꿈을 이룰만한 능력이 있을지 의심을 하게 된다면 자신의 실행능력은 급속하게 떨어지게 된다. 꿈은 자신감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사랑 중에서도 짝사랑은 슬픈 사랑이다. 꿈은 우리를 위해 준비하며 사랑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꿈을 의심하게 된다면 결국 꿈은 우리 곁을 떠나고 만다.

또한, 아버지가 휘청거릴 때 재빨리 잡아주는 것처럼 꿈 역시 우리가 휘청거릴 때 다시 한번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세상 모든 것은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리 계획을 철저히 세웠다 해도 반드시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확실히 믿을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앞으로 나갈 준비를 하게 된다.

아버지와 같은 꿈은 우리에게 항상 손짓하며 환영을 한다. 아버지들은 아이가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할 때 ‘우리 아이가 이렇게 성장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매우 기뻐한다. 그리고 아버지들은 아이가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추억을 잊지 못하고 간직한다. 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에 이뤄달라고 요청할 때 언제든지 흔쾌히 수락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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