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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정연 Jan 11. 2019

비교급에 익숙해진 아이들

(아침 식사 중)

“너 이번 모의고사 등급이 떨어졌는데, 그 등급으로 인-서울 할 수 있겠어! 희성(익명)이는 이번 언. 수. 외 합이 4등급인데 너는 왜 떨어지냐? 희성이랑 너랑 같이 공부했는데 너는 왜 그래?”

“아빠 열심히 해서 다음에는 등급 올릴게요.”

아침 식사 후 진호(익명)가 학교 갈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가 병원으로 출근하는 길에 매일 학교까지 태워주는데 그날따라 진호가 나오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창문만 열려있고 진호는 보이지 않았다. 진호는 창문 밖으로 18살 꽃다운 나이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진호 아버지는 영정사진을 부둥켜안으며 “내가 아들을 죽였어. 그날 내가 그 이야기만 안 했어도 우리 진호 죽지 않았어. 내가 아들을 죽였어.”라고 울부짖으며 통곡을 하였다. 내가 아는 진호는 공부도 잘하고 성실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여린 남학생이었다. 갑자기 이런 비보를 듣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진호 아버지가 그런 말씀만 하지 않으셨어도 되는데 부모 욕심 때문에 진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았다. 한동안 진호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욕심들을 미워하고 원망하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아이들을 상담하면서 내가 아는 학생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들이 진호를 포함해서 3명이다. 수능이 끝나 대학교 발표가 나올 때마다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아이가 있을지 걱정이 되어 유독 그때만 되면 휴대전화로 뉴스만 자주 보게 된다. 한편 나도 반성하게 된다. 나도 상담하면서 부모님 입장으로 상담해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다른 학생과 비교하면서 말을 하지 않았는지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아픔을 언급했는지 등등 많은 생각을 했다.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힘든 사례들 (ex: 공부, 친구, 이성 교제, 선생님 기타 등등)’에 대해 설문 조사를 하였다. 그런데 한 남학생이 이렇게 작성해 제출했다. “내신 관리 해야 하고, 수행평가도 해야 해서 잠잘 시간도 부족하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높은 점수 따기는 어렵다. 친구들과 비교해 보면 나는 내세울 것도 없다. 선생님들은 공부 잘한 애들만 편애해서 내가 너무 비교되어 힘들다.” 이 학생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설문 조사에 응한 모든 학생이 이처럼 비슷한 내용으로 작성하였다. 아이들은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는 것에 힘들고 지쳐있다. 설상가상으로 그것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자긍심을 하락시킨다.

얼마나 오죽하면 학생들에게 ‘성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설문조사란에 한결같이 ‘남들에게 인정받고 돈 많이 버는 것’이라고 작성한다. 자신도 아닌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물론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비교는 ‘필요악’일까?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지금의 아이들처럼 비교를 당하며 살아왔다. 성공의 척도 역시 남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세상이 무한 경쟁 시대이기에 우리는 남과 비교를 하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렇다고 비교가 없는 세상이라든지 아예 비교 자체를 안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교는 자신의 발전 가능성과 단점을 알 수 있기에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그럼 진정한 비교는 무엇일까?

진정으로 자신과 비교한 주체는 누구일까?

진정 비교해야 할 것은 남들과 비교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다. 조카들과 만화를 시청하는데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적을 만났고, 그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이야.” 바로 어제의 내 모습이 비교해야 할 대상이다. 남과 비교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남이 자신을 평가하고 성적표에 매겨진 등급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어제의 자신과 비교하여 스스로 등급을 매겨야 한다. 더구나 타인의 비교에 신경을 쓰고 따르게 된다면 인생 자체는 나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삶을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제의 자신과 비교할 때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고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희극배우이자 영화감독 제작자이며 전 세계 많은 희극인의 롤모델로 꼽히는 찰리 채플린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름을 몰라도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 그리고 콧수염과 중절모자 하면 어느 정도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찰리 채플린은 아카데미상과 인연이 없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서커스>로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를 예정이지만 위원회가 탈락시켰고, 유명한 <모던타임즈>는 단 한 부문도 지명받지 못했다. 다른 영화들 역시 수상에 실패했다. 하지만 제44회 아카데미에서 평생 공로상, 제45회에 아카데미에서 <라임라이트>로 음악상을 받았다. 무려 4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럼 찰리 채플린이 포기하지 않고 좋은 영화를 만들려는 열의를 계속 불태우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 남들이라면 영화 투자자가 적어 포기할지 모른다.

어느 날 어떤 기자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

“당신의 최고 걸작은 무엇입니까?”

“The Next One.”(다음 작품입니다.)이라고 찰리 채플린은 대답했다.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는 것보다 자신이 제작한 영화와 비교하여 그를 최고의 영화인으로 만들었다. 40년이란 시간 동안 힘들고 넘어져 좌절하기보다는 어제와 비교한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자신의 엄지손가락 지문과 똑같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이다. 가치관, 꿈, 타고난 다양한 재능들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가 할 일은 어제의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모습으로 변하여 성공에 길드는 것이다.

어제와 비교하기 위해서는 무슨 힘이 필요할까?

“오늘날 달력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오랜 옛날 달력을 갖는다는 것은 곧 권력을 가졌음을 뜻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나라를 세우면 달력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눠 주었다. 달력은 군주가 ‘나는 천자다. 나만이 하늘의 시간을 읽을 수 있다.’라고 널리 알리는 최고의 홍보수단이었다. 왕조시대에 왕들이 연호를 쓴 것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자신을 출발점으로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는 권력의지의 표현이었다.” <역사e1, p214>{북하우스}

‘시간을 아는 것 = 권력’이라는 공식인 것이다.

세종대왕은 중국과 시간대가 15분이 맞지 않아서 분석하고 연구하기 위해 무려 10여 년이라는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 단지 15분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15분이라는 시간은 조선에 맞는 시간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라는 왕권의 주체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제와 오늘의 나를 비교할 가장 큰 대상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했는지가 중요하다. 남과 비교하면 시간이라는 권력은 남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15분이라는 시간이 중요했기에 1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성을 쏟은 세종대왕처럼 어제의 15분이라는 권력은 내가 움켜잡았는지 비교해 봐야 한다.

독수리는 상승 온난 기류 즉, 위로 올라가는 따뜻한 공기 기둥을 활용하여 하늘에 떠 있다. 상승 온난 기류를 찾게 되면 그 기류 안에서 빙빙 돌아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것을 반복하며 점점 더 높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다. 우리 역시 어제의 상승 온난 기류를 찾아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어제의 자신과 비교하는 과정이 반복될 때 우리의 꿈은 바로 문 앞에서 노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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