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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여우 Feb 01. 2024

[04] 18년 만에 다시 간 융프라우요흐

여행 세 번째 날

2023년 10월 1일 일요일


새벽 6시 인터라켄 동역에서 오늘 날짜 융프라우 굿모닝티켓을 구입했다.


해뜨기 전이라 역 앞에서 추석 보름달도 보았다.

굿모닝 티켓을 사면 시간표를 준다. 아이거글레처에서 융프라우 가는 기차를 8:45까지 타야 한다.


'융프라우 굿모닝티켓'은 코로나 때 융프라우 방문 인원을 분산시키기 위해 생겼다고 한다. 이름 그대로 새벽에 올라가 오후 1시에는 융프라우를 내려와야 하는 조건에 파격적인 가격 할인을 제공한다. 세 식구가 스위스트레블패스 할인과 동신항운 쿠폰 할인을 받더라도 이 굿모닝티켓이 15만 원 정도 더 저렴했다. 시차 부적응으로 초저녁에 잠들고 새벽에 깨는 우리 가족에게 최적의 티켓이다.


조식을 먹고 식당 옆문으로 나가면 인터라켄 동역 플랫폼이 바로 연결된다. 7시 5분 인터라켄 동역을 출발해 약 30분 만에 그린델발트 터미널에 도착했다.


어떤 한국인 아저씨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에게 아빠가 15년 만에 융프라우에 온다며 감격해하고 있었다. 아들 반응은 시큰둥.


나도 여기가 18년 만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해외여행이 일반적이지 않았지만, 20~30여 년 전부터 유럽 배낭여행이 20대 필수처럼 되었고, 그들이 이제 40, 50대가 되어 자녀를 데리고 다시 오는 것 같다.


그린델발트 터미널에서 아이거 익스프레스로 갈아탄다. 아이거 익스프레스는 2020년 12월에 새로 생긴 곤돌라로 아이거글레처까지 15분 만에 이동한다.


곤돌라에서 알프스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남편이 인생 최고의 곤돌라라고 했다.


18년 전 융프라우 산악기차 안내 방송에 처음으로 한국어가 추가되었다. 당시 신문 기사로도 나왔고 나도 기차 안에서 가슴 설레며 한국어를 들었다. 이 곤돌라는 최근에 생겼으니 안내 방송도 새로 녹음했을 테고 이번에도 한국어가 나오겠지 기대했다.


제일 먼저 독일어(독일어권이니 당연)가 나왔다. 그다음 영어(영어니까 당연), 다음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어(스위스 공용어이니 당연), 스페인어(영어 다음으로 많이 쓰이니까), 그리고 한국어가 나왔다! 일본어, 중국어가 그 뒤를 따랐다. 18년 전에는 한국어가 가장 마지막이었는데 그동안 우리나라의 위상이 이렇게 달라진 것인가. 엄청 기분이 좋았다.

아이거글레처에 도착하면 다시 기차로 환승해서 융프라우요흐까지 터널로 이동한다. 곤돌라와 터널 조합으로 융프라우요흐에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어마어마하게 시간이 단축된 것은 맞지만 알프스산을 꾸역꾸역 올라가던 산악 기차 낭만이 없어서 조금 아쉬웠다.


스핑크스 전망대에서


남편은 아들이 스위스를 가고 싶어 해서 함께 왔을 뿐, 본인이 스위스를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융프라우요흐가 너무 좋았다고 한다. 융프라우요흐는 호불호가 좀 갈리는데 이것은 날씨 영향이 크다. 이 날 구름 한 점 없었다.

          

유명한 포토존 스위스 국기 앞에 사진을 찍기 위한 긴 줄이 있었다. 혼자 왔을 때는 사진 찍지 않았는데 가족과 함께라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아침부터 포토존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아이가 사진 찍겠다고 까치발을 들고 낑낑대자 한국 어르신들이 응원해 주셨다.

여기에서는 신라면을 먹는 것이 국룰인데, 굿모닝티켓에는 신라면 쿠폰이 없다. 사 먹을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흔하게 먹는 컵라면을 열 배 가격을 줄 만큼 먹고 싶지는 않았고, 어차피 아이가 아직은 매운 라면을 못 먹는다. 대신 T멤버십으로 받은 융프라우 크림 커피 쿠폰으로 커피 한 잔 했다.


아이에게 기념품으로 열쇠고리를 하나 사 주었다. 우리 부부는 쇼핑에 관심이 없어서, 여행 중에 산 유일한 기념품이 되었다.

독일 낭만주의 화가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가 이동 통로 벽에 있었다. 이 작품을 융프라우와 관련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곳과 너무 잘 어울린다.


전망대에서 여기저기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면서 조금 뛰었더니 숨이 찬다. 역시 'Top of Europe'인가.


오후 1시, 융프라우요흐를 출발했다.


내려가는 길에는 곤돌라 대신 산악열차를 타거나 하이킹을 하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는 다시 곤돌라를 타기로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못 탈 수도 있겠다. 나에게도 인생 최고의 곤돌라였다.

예전에는 융프라우를 가려면 새벽에 출발해서 저녁에 돌아왔는데, 이제는 오전 반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다.


피곤해서 점심은 숙소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인터라켄 유스호스텔 식당도 괜찮은 맛집이라고 한다. 늦은 점심을 먹고 인터라켄 시내를 산책하며 공원에서 패러글라이딩 착륙하는 것을 구경했다.

스위스에서 가장 중요한 계획이었던 융프라우를 다녀오니 큰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내일은 스위스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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