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브리지, 하이라인, 휘트니 미술관
어느새 뉴욕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간다.
당초 계획은 숙소 근처인 허드슨 야즈의 '베슬(Vessel)'에서 시작해 하이라인을 따라 걷는 것이었다. 첼시마켓과 리틀 아일랜드를 거쳐 휘트니 미술관에서 마무리하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오전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을 것 같아 계획을 추가하기로 했다. '뉴욕에 왔으니 브루클린 브리지는 걸어봐야지 않겠냐'는 남편의 제안이었다. 유학 시절 이 다리를 걸었던 기억이 무척 좋았다며 추천했다. 사실 나도 오래전 뉴욕 여행 당시 이곳을 걸으려 했었다. 하지만 일기예보에도 없던 태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다리 입구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었다. 다행이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덥지도 않고 비도 오지 않는, 적당히 구름 낀 하늘.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펜스테이션에서 근처 숙소는 여행자에게 정말 좋은 위치다. 관광을 나서기 전 역 내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바로 지하철을 타고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문한 음식은 플라스틱 통에 담겨 쇼핑백에 포장되어 나왔다. 테이크아웃해서 바로 기차를 타도 되는 시스템이다. 오늘 아침 메뉴는 처음 보는 브랜드의 비스켓 치킨이었는데 바삭한 치킨까스 맛이 정말 좋았다.
지하철을 타고 강을 건너 덤보로 향했다. 여행 첫날 밤, 야경으로 만났던 덤보를 마지막 날 아침 다시 찾았다. 여행의 시작과 끝을 덤보로 장식하게 된 셈이다.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맨해튼 브리지 고가 도로 아래 지역)'라는 긴 이름의 앞 글자를 딴 덤보(Dumbo)는 이름 그대로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이다. 과거 산업단지였던 이곳은 붉은 벽돌의 창고 건물들이 갤러리와 예술 공간으로 변모하며 뉴욕 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특히 붉은 벽돌 건물 사이로 보이는 맨해튼 브리지의 모습은 덤보를 상징하는 포토존이자,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다.
이제 본격적으로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널 차례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이 거대한 현수교는 1883년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으며, 최초로 강철 케이블을 사용한 19세기 토목공사의 정수다.
나무 데크로 된 보행자 전용 도로를 걷다 보면 다리 곳곳에 설치된 안내 패널이 눈에 띈다. 그 속에는 당시로써는 기적에 가까웠던 바다 위 다리 건설 과정과 그 뒤에 숨겨진 뢰블링 가문의 비극적인 헌신이 담겨 있다. 설계자 존 뢰블링의 죽음, 뒤를 이은 아들의 부상, 그리고 결국 현장을 지휘하며 다리를 완공시킨 며느리의 이야기까지. 다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역사 박물관이었다.
옆으로 맨해튼 브리지가 보인다.
브루클린 브리지의 가장 큰 매력은 보행자 통로의 구조에 있다. 한강 다리처럼 차도 옆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도로보다 한 층 높은 곳에 보행로가 있어 차량의 방해 없이 온전히 풍경에 집중할 수 있다. 발아래로는 차들이 지나가고, 눈앞으로는 강바람과 함께 탁 트인 하늘이 펼쳐진다. 무엇보다 아스팔트나 콘크리트가 아닌, 나무 데크를 밟으며 걷는 기분이 좋았다. 오래된 나무 데크의 삐걱거림에서 따뜻하고 빈티지한 감성이 느껴졌다.
이 다리를 건널 때는 방향이 중요하다. 맨해튼에서 브루클린으로 갈 수도 있지만, 브루클린에서 맨해튼 방향으로 걷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야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가까워지는 마천루들을 바라보며 걷는 시간은 뉴욕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완벽한 방법이었다.
저 멀리 자유의 여신상도 보인다.
다리를 건넌 후 다시 지하철을 타고 원래의 계획지였던 허드슨 야즈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허드슨 야즈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위치한 전망대, 엣지(Edge)가 있다. 이름 그대로 건물 끝에 삼각형으로 돌출된 야외 전망대다. 일부 바닥이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100층 상공에서 발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하이라인의 시작점 근처에는 베슬(Vessel)이라는 유명한 건축물이 서 있다. 건축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조형물에 가까운 이 독특한 구조물은 인도의 계단식 우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원래는 누구나 자유롭게 오를 수 있는 전망대로 설계되었으나 잇다른 투신 사건으로 한동안 폐쇄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다시 문을 열었지만, 유료 입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베슬을 뒤로라고 하이라인을 걷기 시작했다. 하이라인(High Line)은 버려진 고가 철로 위에 조성된 공원이다. 과거 화물열차가 다니던 이곳은 트럭 운송의 발달로 기능이 쇠퇴해 1980년 운행이 중단되었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철거 위기에 놓였으나 시민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지상 9m 높이의 빌딩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도심 속, 설치미술과 쉼터, 그리고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산책로는 뉴욕의 필수 관광코스가 되었다. 서울에도 이를 모티브로 만든 서울로 7017이 있다.
거대한 비둘기 조각이다. 이반 아르고테의 'Dinosaur'라는 작품이다. 역시 공룡의 후손.
공원 곳곳에는 부분적으로 기존 철로를 남겨두어 이곳이 과거 화물기차가 다니던 길이었음을 상기시킨다.
하이아인의 정교하고 통일감 있는 디자인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벤치 디자인은 감탄을 자아냈다.바닥재인 콘크리트 패널이 자연스럽게 융기하여 의자가 되는 구조였다. 의자 아래 사각지대에는 트렌치(배수로)를 넣어 기능성을 살리면서도 주변 환경과 매끄럽게 어우러지도록 했다.
기존 철로를 그대로 살리되, 바닥재의 모듈을 철로 간격에 맞춰 나누고, 부분적으로 부드러운 굴곡을 주어 화단과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처리한 점도 돋보였다.
주변 건축물이 굉장히 가깝게 있어 건축물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불편할 수도 있겠다. 가정집 창문은 대부분 거튼이 쳐져 있었다.
하이라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첼시마켓(Chelsea Market)을 만나게 된다. 1890년대 과자 공장이었던 건물을 개조해 만든 이곳은 현재 수많은 식당과 상점이 입점해 있다. 붉은 벽돌과 파이프 등 공장 시절의 흔적이 구석구석 남아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장실 안내 표지판에 각국 언어가 적혀 있었는데, 중국어는 浴室, 한국어 번역이 목욕실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 곳에서 목욕 못할텐데.
점심을 먹고 기념품 쇼핑을 하려 했으나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아들은 핸드폰 케이스를 하나 샀다.
마켓을 나와 부둣가로 걸어가면 인공섬 공원, 리틀 아일랜드(Little Island)가 나타난다. 튤립 모양 구조물이인공섬을 떠받치고 있는 독특한 디자인이 특징인데, 앞서 본 베슬을 설계한 토머스 헤더윅의 작품이다. 공원 자체는 아담하지만 작은 언덕이 있어 산책하며 공원 전체와 허드슨강을 조망하기 좋다.
공원 한편에는 누구나 칠 수 있는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아들이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자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어린 아이가 피아노 치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아들의 피아노 연주는 잠시 인기를 끌었다.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는 하이라인의 남쪽 끝에 위치한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다. 금요일 오후 5시 이후 선착순 예약 시 무료입장이 가능한 'Free Friday Nights'를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마지막 코스로 잡았다.
1929년,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는 자신이 수집한 미국 현대미술 작품들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당시 유럽 미술을 숭상하던 메트로폴리탄 측이 미국 미술을 수준 낮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휘트니는 "그렇다면 내가 직접 짓겠다"며 미술관을 설립했고, 이것이 휘트니 미술관의 시작이다.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MoMA가 유럽 현대 회화 수집에 주력했던 것과 달리, 이곳은 태생부터 가장 미국적인 현대 미술관이다.
현재의 건물은 2015년에 첼시로 이전하여 새로 지은 것으로, 파리의 퐁피두 센터와 뉴욕 타임스 빌딩을 설계한 렌초 피아노(Renzo Piano)의 작품이다. 미술관답지 않게 전면 유리창을 사용하여 시원한 개방감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전하기 전의 건물은 바우하우스 교수로 유명한 마르셀 브로이어가 설계했다고 한다. '바실리 의자'로 친숙한 그 브로이어의 건축물을 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다.
휘트니 미술관을 찾은 가장 큰 목적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였다.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불리는 호퍼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의 도시가 주는 공허함,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를 정적인 화풍으로 담아냈다. 그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은 시카고에 있어 볼 수 없었지만, 다행히 다른 여러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캔버스의 크기가 작았던 점이 인상적이었다.
몇 년 전 'SSG(쓱)' 광고가 호퍼의 그림을 차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패러디 수업을 할 때 예시 자료로 호퍼 그림을 자주 보여주었다.
그 외에도 앤디 워홀, 재스퍼 존스, 그리고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들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루이즈 네벨슨 작품이 전시된 곳이었다. 넓은 공간에 커다란 창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 환한 공간 속에 네벨슨의 검은 조각 작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밝은 빛 때문에 검은색의 그의 작품이 더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휘트니 미술관은 이름 그대로 미국 미술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점차 그 영역을 넓혀왔다. 1982년에는 백남준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는 미술관의 거대한 엘리베이터에 놀라워했다. 잭슨 폴록 같은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워낙 대형이다보니, 작품 운송을 위해서라도 이런 거대한 엘리베이터가 꼭 있어야 할 것 같다.
이곳 미국 현대미술관에도 현대의 협찬이 있었다. 휘트니 미술관에는 야외 테라스가 여러 개 있는데, 그중 가장 크고 그날 유일하게 개방된 테라스의 이름이 현대테라스(Hyundai Terrace)다. 뉴욕 한복판에서 한국 기업 이름을 만나니 반가웠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허드슨강과 뉴욕의 풍경이 좋다.
오늘 하루, 정말 많이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타코를 포장해 숙소에서 저녁으로 먹으며 쉬었다.
숙소 창밖으로 뉴욕의 마지막 밤풍경이 펼쳐졌다. 내일이면 이 곳을 떠난다. 우리 가족은 아쉬운 마음에 오랫동안 도시의 야경을 눈에 담았다. 이렇게 2주간의 뉴욕 여행이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