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링컨기념관, 국립항공우주박물관
오늘도 정말 덥다. 워싱턴 D.C. 에 왔으니 랜드마크인 내셔널 몰과 링컨 기념관은 가봐야 할 텐데, 과연 이 날씨에 움직여도 되는 걸까? 워싱턴 D.C. 의 작열하는 폭염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래도 오전이라면 그나마 좀 서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내셔널 몰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숙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섰다. 하지만 내셔널 몰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고, 태양은 이미 뜨거웠 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멈추기로 했다. 마침 주변에 '홀로코스트 추모 박물관'이 있었고, 박물관 오픈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교사가 되기 전, 전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했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당시 나에게 이곳은 교과서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오래전 워싱턴 여행 때도 필수 코스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90년대에 개관한 곳이지만 지금 다시 보아도 전시 기법이 무척 세련되었다.
관람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공간은 마치 수용소로 향하는 화물 열차를 연상케 한다. 줄을 서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우리에게 직원이 카드 한 장씩을 건넸다. 카드에는 희생자 한 사람의 이름, 나이, 거주지, 그리고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수용소까지 가게 되었는지가 적혀 있었다. 카드마다 각자 다른 인물이 있다.
익명의 다수를 대하는 것과 구체적인 서사를 가진 실존 인물을 마주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감각이다. 단순히 더위를 피하려 들어왔던 우리는, 예상치 못한 역사의 무게감에 압도되어 쉽사리 떠날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강제수용소 입구에 걸려 있던 기만적인 문구이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희생자들의 수많은 신발이다.
마지막 추모 공간에서 아이와 한참을 머물렀다.
다시 내셔널 몰의 잔디밭을 따라 걷는다. 숨이 턱 막히는 날씨다.
워싱턴 D.C. 는 철저히 수도로서 계획된 도시이다. 1789년 헌법에 따라 연방정부 구역이 정해지자,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프랑스 출신 피에르 샤를 랑팡에게 도시 설계를 맡겼다. 랑팡은 평지인 이곳에 낮은 언덕을 만들어 국회의사당을 세우고, 그 앞으로 널따란 내셔널 몰을 배치했다. 구세계의 무질서를 배제하고 신생 공화국의 절제와 질서, 그리고 활력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국회의사당을 등지고 걷는 이 길 양옆으로는 그가 제안했던 대로 문화적 공간들, 즉 지금의 스미소니언 박물관 단지가 늘어서 있다.
걸어가는 길 시선의 끝에 워싱턴 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다. 초대 대통령을 기리는 이 거대한 기념비는 170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오벨리스크라고 한다. 당대에 유행하던 인물 조각상이 아니라 고대 이집트 양식을 택한 건, 아마도 완결성과 균형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리라. 자세히 보면 탑의 색이 묘하게 다른 지점이 있는데, 건설 도중 남북전쟁이 터져 공사가 중단되었던 흔적(약 1/3 지점)이라고 한다.
기념비를 지나 링컨 기념관 쪽으로 계속 걸었다. 이 사이 공간에는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한국전쟁 등 다양한 추모 시설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수많은 영화에 등장했던 직사각형의 기다란 연못, ‘리플렉팅 풀’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 거대한 일직선의 배치는 계획 수도인 호주의 캔버라와도 닮았다. 날씨가 좋았다면 분명 즐거운 산책길이었을 테다. 하지만 체감 온도 43도, 그늘 하나 없는 땡볕 아래 이 길을 걷고 있자니, 도대체 왜 이렇게 거대하게 만들었나 하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 광활함은 과시인가, 아니면 국가의 위엄인가. 의도는 알겠는데, 꼭 이렇게까지 크게 만들어야만 했을까?
멀고 먼 길을 걸어 드디어 그 끝, 링컨 기념관에 도착했다. 그리스 도리아식 신전 양식으로 지어진 이곳은 지붕과 벽이 있으면서도 사방이 트여 있는 개방형 공간이다. 그 안에는 거대한 링컨 좌상이 있다.
링컨의 시선에서 내려다본다. 저 멀리 국회의사당까지 완벽한 일직선이 그려진다.
이 모든 공간이 합쳐져 수도의 상징을 완성한다는 건 알겠다. 웅장함도 느꼈다. 하지만 링컨 기념관까지 오는 길은 너무나 멀었고, 우리는 더위에 지쳐버렸다. 이 정도 규모면 기념관 옆에 링컨 박물관 하나쯤 있어도 좋잖아? 그럼 더위도 피할 수 있을 텐데.
이제 오후 12시. 링컨 기념관에서 가장 가까운 역인 Foggy bottom gwu station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다시 스미소니언의 시원한 박물관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마침, 링컨 기념관 옆으로 링컨 박물관이 곧 개관한다는 표지판을 보았다. 역시,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한가 보다.
점심은 'Rice bar'라는 곳에서 먹기로 했다. 사실 이곳은 우리가 워싱턴 D.C. 에 도착한 첫날 저녁을 먹으려던 곳이었다. 하지만 기차 연착과 선로 고장으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우리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지막 주문이 끝난 뒤였다. 그때의 아쉬움을 달래며 오늘 점심은 여기서 먹기로 했다.
식당은 관공서 건물 안에 위치해 있었다. 멀리서부터 긴 줄이 눈에 띄었다. 설마 우리가 가려는 그곳인가? 했는데, 역시나였다. 건물 내 수많은 식당 중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유일한 곳은 바로 우리가 가려던 한식당이었다.
이곳은 비빔밥 전문점이다. 운영 방식이 독특한데, 마치 서브웨이 샌드위치처럼 모든 재료를 직접 골라 담는 식이다. 입구에서 주문서를 뽑아 밥 종류, 다섯 가지 토핑, 그리고 소스를 선택하면 된다. 계란 프라이나 고기는 추가 요금이 있다. 물론 불고기 비빔밥 같은 시그니처 메뉴도 있다.
주문이 들어가면 재료 앞에 일렬로 선 직원들이 빠른 속도로 그릇에 밥과 토핑을 담아낸다. 뚜껑만 닫으면 서빙 완료라 포장 손님도 많았다. 줄은 길었지만 회전율이 빨랐고, 줄어드는 속도만큼 새로운 손님들이 계속해서 뒤를 이었다.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줄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주인 부부는 한국인이었는데, 한국인 특유의 그 빠르고 효율적인 시스템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흥미로운 건 식당을 가득 메운 손님 중 한국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비빔밥이 이렇게나 사랑받는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다니 새삼 놀라웠다. 생각해 보면 취향껏 다양한 재료를 골라 담을 수 있는 비빔밥이야말로, 다양성이 공존하는 다문화 국가 미국에 딱 맞는 건강 메뉴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잔치국수까지 곁들여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즐거운 식사 덕분인지, 오전에 내셔널 몰 땡볕 아래서 고생한 기억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오후 일정은 국립 항공우주박물관이다. 현재 일부 구간이 공사 중이라 그런지 사전 예약이 필수였다. 예약해 둔 오후 1시에 맞춰 입장했다.
이곳은 미국의 비행 역사를 집대성한 곳이다. 로비에 들어서면 탁 트인 공간 공중에 매달린 여러 대의 비행기가 시선을 끈다. 웅장한 공간감과 거대한 기체들이 주는 압도감이 대단하다.
전시관에는 라이트 형제의 최초 동력 비행기부터 1, 2차 세계대전을 거친 전투기들, 그리고 우주 탐사 경쟁과 달 착륙에 이르는 비행의 모든 과정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전시된 모든 것이 실물이라는 사실이다. 모형이 아니다. 실제로 하늘을 날았고, 전쟁에 참전했으며, 우주를 다녀온 기체들이다. 기체 곳곳에 남아 있는 낡은 흔적들은 그것이 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실제 역사의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화려한 연출보다 ‘진짜’가 주는 사실감이 이 박물관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아이는 오늘 일정 중 이곳을 가장 즐거워했다. 뮤지엄샵에서 친구들에게 줄 기념품들도 구입했다. 비행기에 관심이 많은 남편이 오늘의 가이드가 되어 아이와 신나게 관람을 이어갔다. 나는 오전부터 이어진 더위와 피로에 지쳐 자세히 둘러보지는 못했다.
오늘 저녁도 지인과 저녁 약속이 있었다. 지인이 예약한 'Anju(안주)'라는 이름의 한식당이었다. 이름이 '안주'라니, 왠지 술을 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1층은 바(Bar) 분위기가 났다. 우리는 2층에서 식사를 했다. 현지화된 퓨전 한식당이라 그런지 직원 중에 한국인은 없었다. 메뉴판을 보는데 '30 day Kimchi'라는 메뉴가 눈에 띄었다. 30일 된 김치라니, 묵은지를 말하는 걸까? 재미있는 이름이다.
지인은 돌솥비빔밥을 주문했는데 거의 먹지를 못했다. 워싱턴의 살인적인 폭염에 펄펄 끓는 돌솥에 담긴 비빔밥을 마주하니 너무 뜨거워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워싱턴이 뉴욕처럼 그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운 건 맞는데, 요즘은 유난히 더 덥다고 한다. 반면 나와 남편은 뜨거운 돌솥에 담긴 김치찌개와 찜닭은 호로록 먹어치웠다. 역시 한국인은 이열치열인가. 우리만 너무 잘 먹은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흥미로운 문구를 봤다.
'customer Restroom Available'
어라? 뉴욕 지하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지하철 공중 화장실이 워싱턴에는 있다는 건가? 역시 수도의 품격인가? 마침 아이가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화장실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직원에서 물어보니 따라오라고 한다. 그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Staff Only(직원 전용)' 구역. 결국 요청하면 직원 화장실을 쓰게 해 주는 시스템인 것 같다. 그럼 그렇지. 뭘 기대한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