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부정한 예술가, 마르셀 뒤샹' 이번 학기개념미술 관련 수업을 준비하면서읽은 책이다. 뒤샹의 삶과 작품을 시대순으로 설명하고 있다.
뒤샹은 참 난해하다. 그의 작품 세계도 난해하고, 그 인물은 더 난해하다. 표지 사진은 면도용 비누를 얼굴과 머리에 잔뜩 바르고 머리카락을 뿔처럼 만든 뒤 찍은 것이다.
뒤샹의 삼 형제
뒤샹 삼 형제 사진이다. 왼쪽이 마르셀 뒤샹, 가운데 자크 비용은 화가, 오른쪽 레몽 뒤샹-비용은 조각가, 삼 형제 모두 예술가이다.
레디메이드
뒤샹은 '레디메이드(기성품)'라는 개념을미술에 최초로 도입했다. 작가가 직접 그리거나 제작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선택한 사물이 예술이 되는 것이다. 뒤샹의 '샘'을 기준으로 미술의 개념이 바뀌게 된다.
마르셀 뒤샹 '샘' 1917 (1964)
1917년, 뒤샹은 철물점에서 흰 도기로 된 남성용 소변기를 사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R, Mutt라고 서명하고 앙뎅팡당 전에 제출했다. 앙당팡당 전은 출품료만 내면 누구나 전시할 수 있었지만 뒤샹의 작품은 심사위원들에 의해 전시가 거절되었다.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은 일제강점기에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얻기 쉽지 않은 지식인의 현실을 '팔리지 않는 기성품'으로 표현했다.
오늘날은 기성품 아닌 것을 찾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에, '기성품'이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하지 않는다. 기성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20세기 초에는 유럽과 미국을 건너 동양에서까지 '레디메이드(기성품)'라는 용어가 많이 쓰였던 것 같다.
미술계의 변화
'샘'의 제작 연도는 1917년과 1964년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레디메이드에 원작이라는 용어를 붙이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1917년의 '샘' 원작은 사라졌고, 지금의 '샘'은 당시 스티글리츠가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다시 만들었다. 1917년 소변기와 같은 제품을 찾을 수 없어 주문 제작한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레디메이드가 아니다.
1917년에는 전시 거절당했던 작품을 1964년에는 특별히 주문 제작하여 전시하기까지, 그동안 미술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뉴욕으로 망명한 예술가들, 1942년경
1942년, 뉴욕의 예술가들 사진이다. 앞줄 왼쪽부터 스탠리 윌리엄 헤이터, 레오노라 캐링턴, 프레데릭 존 키슬러, 쿠르트 셀리그만, 둘째 줄, 막스 에른스트, 아메데 오장팡, 앙드레 브르통, 페르낭 레제, 베레니스 애벗, 셋째 줄, 지미 에른스트(막스 에른스트의 아들), 페기 구겐하임, 존 페런, 마르셀 뒤샹, 피에트 몬드리안이다.
유명한 예술가들이 한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사진을 찍은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다.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술의 중심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지게 된다.
미국의 미술 평론가 그린버그는 회화에서 평면성을 강조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유럽에서 시작된 추상회화는 점차 단순화되어 잭슨 폴록의 추상 표현주의에서 완전한 평면성을 이루며 추상화를 완성했다. 그린버그의 예술론은 유럽이 아닌 미국이 미술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고, 2차 세계대전 직후 잭슨 폴록을 중심으로 한 추상표현주의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뒤샹은 관심 밖으로 물러나 조용히 체스에 몰두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미국의 유력한 미술평론가 그린버그와 로젠버그는 추상표현주의가 세계적인 대세라고 떠들어댔다. 그들에게는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이 유럽에 뽐낼 수 있는 유일한 미술의 자산이었다. 로젠버그는 폴록, 데 쿠닝, 클라인 등의 작품을 액션 페인팅이란 말로 미학적으로 분류했고, 그린버그는 스틸, 로스코, 뉴먼의 작품을 컬러필드 페인팅이란 용어로 두둔했다. 그린버그와 로젠버그에 의해 미국의 평론도 한 단계 높아졌다. 이제 미국 예술가들도 유럽 예술가들에게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서도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셈이다. (p241)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1960년대에 팝아트, 미니멀리즘 흐름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오래전 뒤샹이 취했던 입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미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새로운 미학으로 1917년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을 도입했다.
1917년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것은 그동안 그가 꾸준히 보여준 반미술, 반모더니즘 행위에서 비롯했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은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천재적 창조성을 높이 평가한다. 작가의 예술적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미술품의 고귀한 가치를 강조한다.
포스트포더니즘에 이르러 예술가와 미술품의 권위는 사라진다.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으며, 모든 사물은 예술품이 될 수 있다.
레디메이드 미학은 모든 사람이 미술품의 창조자가 될 수 있음을 시위했고, 모더니즘이 주장하는 개인의 천재적 창조성을 부인했다. (p 11)
포스트모더니즘이 곧 뒤샹의 레디메이드 미학이다. 그래서 예술가를 부정한 예술가, 뒤샹은 "미래 미술의 조상, 다다의 아버지, 팝아트의 할아버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라는 화려한 수식어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