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대학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읽었던헬렌 켈러 평전이다. 당시소장하고 싶었는데 절판이었다.이후 장애인의 날 기념으로 재출간되어 구입했고 두 번째로 읽었다. 그리고 또 절판되었다. 몇 년 뒤 내가 큰 수술을 하고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 이 책이 생각나서 다시 읽었다. 그게 세 번째.
헬렌 켈러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대부분 위인전 속 어린 헬렌이 펌프가에서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감동적인 장면에 멈추어 있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위인전에서 알려주지 않았던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에 대한 삶을 자세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각-청각 장애인의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인상적인 내용들이다.
앤 설리번은 시각 장애인이다.
앤 설리번 선생님은 빈민보호시설에서 외롭고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영리하고 의지력이 강했다. 보호시설 실태 조사를 나온 조사관 앞에 뛰어들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외쳤고, 그 덕분에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학교에는 시각-청각 장애인에 심지어 미각, 후각마저 없는 로라 브리지먼이 있었다. 그녀는 오직 촉각으로만 산다. 설리번은 그녀를 교육하는 방식을 보았기에 헬렌을 가르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헬렌의 가정교사가 된 것은 먹고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앤 설리번은 여러 번 눈 수술을 받아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했지만 두 눈 모두 정상적으로 초점을 맞추지는 못했다. 그런 눈으로 몇 시간씩 헬렌에게 글씨를 써 주었기 때문에 시력은 점점 더 나빠졌고 말년에는 거의 앞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헬렌 켈러의 스승으로 앤 설리번만 기억하고 있지만, 앤 설리번이 죽은 뒤 폴리톰슨이 40여 년 간 헬렌 켈러를 보살펴 주었다. 헬렌 켈러는 앤 설리번보다 폴리 톰슨과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셈이다.
헬렌 켈러는 어린 시절부터 유명 인사의 삶을 살았다.
십여 명의 미국 대통령을 만났으며 루스벨트 대통령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전화기를 발명한 벨과는 어린 시절부터 친했다. <톰소여의 모험> 소설가 마크 트웨인, 찰리 채플린 등 과도 인맥을 가지고 있다. 일본 외무성은 헬렌에게 일본 아키타 종의 개를 선물해서, 미국에서 처음으로 아키타 종의 개를 기르는 사람이 되었다. 헬렌이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이탈리아 정부는 헬렌이 직접 다비드 상을 만져볼 수 있도록 특별한 발판을 놓아주었다. 또한 당대에 헬렌 켈러를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 연극이 제작되었다.
헬렌 켈러의 가족은 헬렌 켈러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했고, 그녀가 가진 '성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독신을 강요했다.
헬렌은 사실 돈벌이에 앞서 겉모습부터 가꾸어야 했다... 앞으로 강연을 하려면 사람들의 냉혹한 눈길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헬렌은 두 눈을 없애고 유리눈을 새로 끼웠다. 보이지 않는 눈 대신 가짜 눈을 끼우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이로웠을 뿐만 아니라 겉모습을 눈에 띌 만큼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p 293)
헬렌 켈러의 왼쪽 눈은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시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를 감추기 위해 어린 헬렌 켈러 사진은 늘 오른쪽 측면 사진이었다. 유리눈을 끼운 뒤부터 정면 사진이 가능해졌다.
그 밤, 헬렌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챙겨 내려와 현관에서 그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오지 않았다. 어쩌면 오던 길에, 살아갈 날들이 힘들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구태여 그런 삶에 휘말려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 여인이 밤새도록 현관에 서서 영영 오지 않을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뭐라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저려온다. (p 320)
헬렌에게도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가족의 반대로 두 사람은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날 밤 그는 오지 않았고, 그렇게 헬렌의 사랑은 끝이 났다. 저자처럼 나도 이 대목이 참 마음 아팠다.
헬렌은 평생 어떤 사람, 또는 어떤 단체의 볼모로 살아왔다. 그들은 헬렌을 앞세워서 잇속을 차리려 했다. 누군가 얘기했듯이 헬렌은 '고위급 포로'였다. 헬렌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일을 흔쾌히 거들었다. 그것 말고 달리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p 520)
헬렌 켈러는 12세에 <얼음나라 왕>이라는 짧은 이야기를 썼고, 이것 때문에 표절 혐의를 받았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헬렌은 동화를 떨치고 나와 복잡한 현실 세계로 발을 내딛지 못했다...책에서 읽은 장면과 등장인물들을 집에서 벌어지는 일상과 사람들처럼 현실로 여겼다. 그녀는 한평생 환상의 세계에서 살았는 지도 모른다. 영웅과 악인들이 사는 곳, 선이 마침내 악을 물리치는 곳에서. (p 111)
헬렌이 정말로 표절을 했는지도 모른다. 책에서 읽은 내용, 꿈, 상상한 것들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겨우 열두 살짜리에 장애가 있는 그녀에게 표절 혐의는 가혹했다. 헬렌에게 천재 이미지를 씌워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퍼킨스 학교(설리번의 모교인 시각장애인 학교)는 헬렌의 표절 사건으로 평판이 떨어지자 그녀를 가혹하게 심문했다.
헬렌 켈러가 쓴 '사흘만 볼 수 있으면' 책처럼 헬렌은 세상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혹은 어릴 때 시력을 잃은 사람이 시력을 되찾게 되면 시각적 인식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공간이나 형태, 거리, 크기를 알지 못하고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사물을 구별하지 못한다.
헬렌 켈러는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기 전 자신의 삶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그저 본능에 의한 삶인 것 같다.
선생님이 오기 전에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나는 무(無)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허깨비였다. (p 92)
헬렌 켈러는 사회주의자였다.
냉전 체제 속에서 FBI가 그녀를 조사하지 않은 이유는, 헬렌이 공산주의에 동조하지만 국가 안보에 위협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고, 전화기를 사용할 수 없는 그녀를 도청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헬렌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구성해서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평전이라는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또한, 장애인들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절판된 것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