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여행을 준비하며 정리한 태국 역사
태국은 역사가 짧다.
13세기에 비로소 독립된 왕조가 등장했다.
태국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도 정확하게 정의되지 못했다. 세 가지의 유력한 학설이 있을 뿐이다.
첫 번째, 중국 남부를 포함하여 베트남, 버마, 인도 등등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이주했다.
두 번째, 중국 남부에서 이동했다.
세 번째,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다. 원래 여기 있었다.
현재 두 번째가 가장 유력하긴 한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첫 번째 의견에 동의한다. 태국 역사를 볼 때 타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별로 거부감이 없다. 여러 민족의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어 현재의 태국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할리우드 극장과 힌두교 가네샤 제단이 나란히 자리한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서로 다른 두 문화가 한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풍경은 방콕의 독특한 매력을 보여준다.
태국 국립박물관에는 선사시대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유물들이 현대 태국인과 관련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짧은 역사를 어떻게든 늘여보고자 하는 태국인의 노력이 느껴졌다.
뚜렷한 왕조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 땅에 자잘한 세력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곤 했다. 이때 인도, 크메르 등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 태국 지역은 앙코르와트의 크메르 왕국이었다.
최초의 왕조가 등장한다. 앙코르와트의 영향력이 약해졌을 때 드디어 독립된 왕조가 탄생한다. 수코타이 왕조는 최초의 왕조라는 의미뿐 아니라 최초로 문자가 탄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람캄행 대왕이 크메르 문자를 기반으로 타이 알파벳을 만들고, 1292년 이 문자로 비문을 남겼다. 이 비문은 태국 국립박물관 역사관 도입부에 전시되어 있다. 람캄행은 그래서 대왕이 되었다. 방콕에는 람캄행 도로도 있다. 세종대왕의 한글보다 빠르지만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타이 알파벳은 자음 44개, 모음 28개이다. 태국어는 말하기는 어느 정도 배울 수 있지만, 문자를 배우는 것이 정말 어렵다. 태국 문자를 공부해 보려고 책을 샀다가 관둔 적이 있다. 태국 문자는 머리 나쁜 사람이 대충 끼워 맞춰서 만든 글자 같다는 말이 있다. 만약 우리가 한글의 존재를 몰랐다면, 문자가 본래 이런 형태인 줄 알고 어렵사리 익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위대한 한글을 아는 우리에게 태국 문자를 배우는 일은 고역일 수 있다.
치앙마이에서 260년간 번성했다. 그래서 치앙마이에는 란나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건물이 많다.
태국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국가이다.
아유타야의 큰 업적은 앙코르왓트를 점령한 것이다.
그리고, 버마(미얀마)에게 15년간 식민 지배를 받았다.
태국인들은 한 번도 식민지였던 적이 없음을 자랑스러워하지만, 사실은 잠깐 있었다. 바로 이때. 하지만 뭐 15년, 짧았잖아? 이러고 넘긴다고.
아유타야는 버마에게 점령당해 폐허가 되었다. 앙코르왓트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둘 다 비슷한 문화권이고 정글 속에 버려진 채 폐허가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대에서 단명했다.
현재 짜오프라야 강 서쪽에 세워졌다. 왓 아룬이 남겨져 있다.
1782 짜오프라야 강 동쪽에 세운 오늘날 방콕이다. 라마 1세가 세웠고, 지금 왕이 라마 10세이다.
라마 2세(라마 1세의 아들)는 어린 적자(몽꿋)를 보호하기 위해 서자인 라마 3세에게 왕위를 계승했다. 몽꿋은 라마 3세 재위 27년 동안 승려로 지내며 학문을 닦았다.
몽꿋(라마 4세)은 영화 ‘왕과 나’의 그 왕이다. 영화에서 라마 4세가 멋있고 귀엽긴 했지만, 존엄한 왕을 그것도 태국인이 존경하는 라마 4세를 희화화했기 때문에 태국에서는 상영 금지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명화극장에서 재밌게 봤었지만, 다시 본 그 영화는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이 느껴져서 씁쓸했다. 라마 4세는 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위대한 왕이었다. 근대 식민지 시대에 태국이 유일하게 독립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라마 4세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마 4세는 최초의 근대적 도로를 만들었다. 방콕의 라마 4세 도로이다.
그 영화에도 등장하는 세자인 라마 5세, 쭐라롱껀 대왕은 태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왕이다. 1910년 10월 23일에 사망했으며 그날은 국가공휴일이다. 1917년에는 태국 최고의 명문대학 쭐라롱껀 대학이 세워졌다. 라마 9세의 직계 할아버지이다. 라마 9세가 존경받았던 것은 덕이 있어서도 있지만 쭐라롱껀의 직계 손자이기 때문이다.
라마 6세(쭐라롱껀의 아들), 학교를 많이 세웠다.
라마 7세(쭐라롱껀의 아들), 1932년 입헌 군주제를 도입했다. 이후 군부 쿠데타가 계속되고 있다.
마히돌 왕자(쭐라롱껀의 아들), 하바드 의대를 졸업한 태국 현대 의학의 아버지이다. 그의 이름을 딴 마히돌 의대는 태국 최고의 의대이다. 최고의 대학인 쭐라롱껀 대학은 의대가 없다.
라마 8세(라마 7세의 조카, 마히돌 왕자의 아들)는 10살에 왕이 되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와 46년 의문의 총에 의해 죽었다. 총기사고이다, 자살이다, 타살이다는 설이 있고, 타살로 결론 내렸지만, 정확한 것은 아직 모른다. 라마 9세는 일본의 소행으로 생각했다. 짜오프라야 강에 라마 8세 다리가 있다.
1946년 라마 8세의 죽음으로 동생인 라마 9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2016년까지 70년 동안 재위했다. 예전에는 세계에서 최장기간 왕이었는데, 1952년에 왕위에 오른 영국 엘리자베스 2세가 더 오래 살면서 2위가 되었다. 여왕이 100일 정도 더 왕위에 있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최 장기간 왕인 영조는 52년이다.
공주 세 명, 왕자 한 명이 있다. 첫째 공주 이혼, 둘째 공주 미혼(국민들이 가장 좋아한다), 셋째 공주도 이혼, 왕자는 개차반으로 세 번의 이혼을 했다.
그 왕자가 현재 라마 10세이다. 왕위에 오르기 직전 네 번째 결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