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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람 Aug 05. 2021

회사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몬스테라 관찰일지 - 여섯 번째


 새로운 줄기가 금방 다시 돋았다. 이전에 새로 돋았던 이파리 색깔이 짙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주말 동안 본가에 다녀온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휴가까지 붙여 자취방을 길게 비웠다고 하더라도, 일주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분간은 화분에 큰 변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놀랐다. 이번에 나온 줄기는 처음에 돋았던 이파리보다 더 빠르게 자라는 것 같았다. 눈치를 채지 못했을 뿐, 화분은 날마다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생활에 거의 다 적응했을 즈음, 당분간 일상에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직 모르는 업무도 많았지만 배우면 될 일이었다. 회사가 어려워져 월급이 늦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조차 아무 생각이 없었다(돌이켜보면 회사에서 월급을 늦게 준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 업무 시간이 끝나기 전에 월급이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와는 달리, 매달 인출되는 돈이 있던 선배들은 급전을 마련하느라 절박했다. 당시는 치열한 경쟁을 버티지 못한 많은 해운회사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던 때였다.


 사채권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게 되어서야, 비로소 일상에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회사에 현금이 부족해,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회사가 망한다고 했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직접 사채권자를 찾아가, 회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하고 만기를 연장할 수 있도록 설득하라 했다. 각각의 업무를 하는 것보다 부도 위기의 회사를 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재무팀의 간략한 설명을 들은 직원들은 전국 각지의 증권사로 배치되었다. 사채권을 예치하고 있는 증권사 정보만 알 수 있을 뿐, 사채권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증권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회사에 돈이 없어 출장비는 우선 개인이 쓰고, 이후에 회사로 청구하라고 했다. 직원들은 출장비를 언제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회사를 살리자며 길을 나섰다.


 나는 경기도 안양에 위치한 증권사로 배치되었다. 깔끔한 정장에, 평소보다 더 깨끗하게 닦은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하필 날이 더워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땀방울이 느껴지는데도, 지하철 한 번에 갈 수 있다며 안도했다. 출근시간에 회사를 가지 않게 되어 철없이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두근대는 설렘은, 지하철을 내리면서 긴장감으로 변해 있었다. 2인 1조로 배정되어 함께 가는 선배가 있었지만, 둘 모두에게 사채권자를 찾아가는 일은 처음이었다(나는 사실 사채권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지하철 평촌역과 범계역 근처에 있는 여러 증권사 사무실을 다녔다. 넓지 않은 지역에 그렇게나 많은 증권사 사무실이 있었지만, 우리를 반기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증권사에서는 고객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없다고 했다.

 "H사에서 나온 직원들입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만, 저희 사채권 보유하신 개인을 만날 수 있을까요? 사채권자 집회 때문입니다."
 "아, 이야기 들었습니다. 저희가 고객님들께 안내를 할 겁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직접 연락할 순 없을까요?"
 "아, 곤란합니다. 고객분들께 안내를 드리고,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어려운 부탁을 드려서."
 "네, 우선 나가시죠."
 "죄송합니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도, 알맹이 있는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근처에서 기다렸지만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인사와 기다림으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회사에 들어와 처음 소속감을 가지고 했던 일이, 회사를 대신해 고개를 숙이는 일이었다.


 일부 증권사의 협조로 사채권자를 직접 만난 직원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오히려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채권자들은, 자신을 찾아온 회사 직원들에게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고 했다. 직원들은 미안하다고, 한 번만 도와달라고, 위기를 극복해서 좋은 회사로 거듭나겠다고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회사는 사채권자들을 설득한 끝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후에도 사채권 만기가 도래할 때마다 직원들이 종종 착출 되곤 했지만, 회사는 조금씩 어려움에서 벗어났다. 신문에는 회사가 사채권자 집회를 성공적으로 넘기면서, 회생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됐다는 기사가 짧게 실렸다. 수많은 직원들의 수고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평화로운 회사 간판뿐이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발버둥은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아름다운 빌딩 숲은 사실, 아름답지만은 않은 일상으로 쌓아 올렸을지 모른다.

눈치 채지 못할 뿐, 그냥 지나가는 하루는 없었다.
가만히 있는 줄 알았던 화분이 어느 날 새 줄기를 내놓았다. 몬스테라는 날마다 자라고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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