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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람 Aug 12. 2021

투사가 되기까지

몬스테라 관찰일지 - 일곱 번째


 말려있던 이파리가 펼쳐지고 나서야 그럴듯한 모양이 되었다. 처음에는 튀어나온 것이 이파리인지 뭔지 구분 조차 하기 힘들었다. 웬만큼 자라고 나서야 '아하, 이놈이 이파리였구나!' 하고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도 나무가 잘 자란 뒤에야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나무로 자라지 못한다면 원래 '싹수가 노랗더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화분이든 사람이든 일단 잘 자라고 볼 일이다.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H사 직원들의 파업 여부가 뉴스에 나올 정도지만, 처음부터 직원들의 단체 행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10년 가까이 임금을 동결하든, 수조 원에 이르는 영업이익이 났는데도 보상이 없든, 직원들의 노력은 크지 않다며 격려금 조금 먹고 떨어지라고 하든, 아무 말도 못 했을 것이다. 사무실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잠잠했을지 모른다(나 같은 한 둘이 큰 소리를 내기야 했겠지만, 모난 돌이라며 정이나 맞았겠지). 임금협상으로 회사가 시끄러워지고서야 노조가 꽤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입사를 하고 회사에 노동조합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노조도 없는 S전자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요." 하고 허세를 부렸기에 놀라움은 더 컸다. 그간 그룹사의 눈치를 보느라, 직원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 회사의 대주주가 그룹사에서 국책은행 관리단으로 바뀌는 시기가 되고서야, 직원들 사이에 비밀스러운 이메일이 오갔다. 노동조합을 만드는데 찬성하는지, 그렇다면 어느 시점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지 등의 의견을 묻는 내용이었다. 혹시 회사가 망하더라도, 노조가 있으면 직원들이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발 등에 불이 떨어지고서야 직원들은 힘을 모으기로 했다.


 처음 조합을 만드는 자리에 모인 사람은 열명 남짓이었다. 사람들은 퇴근 후 대학로에 있는 한 스터디 카페에 모였다. 마침 비가 와서 스터디 카페까지 우산을 쓰고 갔는데, 신분을 숨긴 스파이들이 비밀 장소에 모이는 것 같았다. 불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면서, 은밀하게 모인 사람들은 누가 왔는지 서로를 경계했다. 사람들을 불러 모은 선배 T는 회사에서 노조를 눈엣가시처럼 여길 수 있어 외부 장소를 마련했다고 했다. 노조원의 숫자가 많아지기 전까지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도 했다. 우리는 각자가 생각하는 조합의 방향성이나 요구사항을 나누고, 지부장과 부지부장 등 대표를 선출하는 것으로 모임을 파했다.


 굳이 회사가 위태롭지 않더라도, 직원들 모두가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창구는 필요하다. 회사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합원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 단체협약을 요구하자, 회사도 더 이상 노동조합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합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 회사의 입장이었다. 직원들은 점심시간에 회사 앞으로 모였다. 인근 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하고, 언론사 기자들을 부르고, 제작한 피켓을 들었다. 회사가 어려우니 직원들의 급여를 당장 올려주진 못하더라도, 단체협약을 맺음으로 노조를 공식적인 경영 파트너로 인정해달라고 했다.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고서야 회사는 단체협약을 받아들였다(물론 몇 가지 내용은 고쳤지만). 회사는 회사의 일을 했고, 노조는 노조의 일을 할 뿐이었다.


 작년에 회사는 10여 년 만에 흑자를 기록했다. 언론은 해운 재건 계획이 본격화되었다며 떠들썩했다. 기간산업 부활에 참여한 모두를 격려하면서도, 정작 수고한 직원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노조는 회사가 어려움을 극복했으니, 직원들의 임금도 정상화시켜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회사는 국책은행 관리단의 허락 없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했다(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인이 있기나 할까). 직원들은 다시 피켓을 들고 길거리로 나섰다. 주머니에 넣은 핫팩과 뜨거운 캔커피도 금방 차가워지는 추운 날이었다. 회사는 흑자가 난 것이 임금협상 기준연도가 아니라며, 내년을 기약하자고 했다. 회사에는 아직 갚을 빚이 많았으므로, 노동조합에서도 더 강력하게 요구할 수 없었다.


 올해 회사는 1/4분기 만에 작년 전체의 영업이익만큼을 벌어들였다. 노조는 희망적으로 올해 임금협상을 개시했다. 이번에는 임금을 정상화할 수 있겠지. 하지만 회사는 노동조합이 제시한 의견에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 직원들이 파업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나서야 회사의 답이 있었지만, 터무니없는 제안이었다. 회사는 관리단의 허락 없이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했고, 국책은행은 노사 갈등에 끼어들지 않겠다 했다. 직원들의 요구에 아무도 책임지고 답하지 않았다. 그 사이 노사 협상은 모두 결렬되어,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만을 앞두게 되었다.


 중노위에서 조정안이 타결되지 않으면 노동조합은 합법적인 쟁의권을 갖게 된단다. 파업을 하지 않고 합의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쉽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이미 1차 조정에서 아무 결론이 없었다). H사의 노동조합이 '될성부른 떡잎인지 아닌지' 훗날에야 평가받겠지만,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음은 분명했다. 오늘의 선택이 쌓여 내일이 된다는 점에서, '싹수가 노랗게 되지 않는' 노력은 당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 직원의 파업이라는 결과로 나타날지는 곧 결론이 날 것이었다.

사무실에는 묘한 전운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말려있던 이파리가 천천히 펴지고 나서야 몬스테라의 모습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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