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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람 Aug 22. 2021

구멍 난 이파리

몬스테라 관찰일지 - 여덟 번째


 몬스테라가 새로 낸 잎은 찢잎이라 불리는 이파리였다. 큰 이파리가 햇빛을 가리지 않도록, 줄기가 바람에 꺾이지 않도록, 내리는 빗물을 막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구멍 난 이파리를 낸다고 했다. 주위 환경에 따라 이파리 모습이 바뀐다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친 것 같았다. 되는대로 자라는 줄 알았던 식물이 그때그때 다르게 자란다니 놀라웠다. 생존하기 위해 적응하는 모습이 사람보다 오히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는 누구랑 함께 일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환경이었다. 일이야 누구든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일머리에 따라 습득 속도는 달라질 수 있겠다), 누구와 함께 하는지에 따라 직장생활이 즐거울 수도 괴로울 수도 있었다. 모두가 서로 다른 사람이기에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았다. 먹고사는 문제가 걸린 사회생활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어서 서로가 경쟁자였다. 실제 직장 스트레스로 상담치료를 받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호소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상엔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어서 명확한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회사 일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사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일지 모른다.


 R은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최대한 미루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일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았는데, 애초에 본인이 할 일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R이 해야 할 일은 자연스레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새 담당자는 원래 R의 업무라고도 말하지 못했는데, 지시받은 일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새로 생긴 일을 맡은 것이라 여겼다. R은 시간이 많이 들면서도 윗사람 눈에 띄지 않는 업무일수록 더 많이 미뤘다. 미룬 일을 결국 R이 할 때도 있었지만, 새로운 담당자에게 넘어가는 일이 계속 반복됐다. R은 윗사람들에게 무엇이든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장황했으므로 잘못된 정보도 맞는 것처럼 들렸다. 이전 팀에서는 모르는 것이 없어 '에이스'라 불리며 매년 높은 고과 점수를 받았다고도 했다.


 동기가 있는 팀에서는 J가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고 했다. 그는 후배들의 업무까지 빼앗아한다고 했다. 담당자가 정해져 있는 업무에도 본인이 나서서 처리하고 혼자 인정받기 원한다고 했다. J가 윗사람들의 칭찬을 받을수록, 원래 담당자들은 일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일이 잘못되어 수습해야 할 때, J는 모른 체했다. '아, 제 담당이 아니어서요.' 후배들은 상사에게 혼날 때만 업무 담당자가 되었는데, J가 하던 일이었으므로 영문도 모르면서 욕을 먹어야 했다. J에게 직장동료는 본인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처럼 보였고 J는 그 도구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었다. 팀원들이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회사에 피해를 끼친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회사는 J를 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외에도,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상대방의 멱살을 잡는다는 K. 직장 후배들로부터 자신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강요하는 L. 일보다 술자리에서의 인맥 쌓기를 중요시하는 N. 맡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 본인이 가장 일을 많이 하는 것처럼 말하는 B. 무엇이든 말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Y. 세상에 같은 사람이  명도 없듯이, 모두 다른 모양으로 주위를 힘들게 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회사에서 인정받았고, 외국 지사에 주재원을 다녀와, 높은 자리에 오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을 물로 삼아 밟고 올라가는 사람만이 회사에서 살아남는  같았다. 어느 팀에나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 '또라이 질량 보존 법칙' 실재한다고   있었다(그들의 입장은 다를  있겠지만 내가   아니다).


 물론 회사에 좋은 사람들도 많았다(그들이 아니었으면 애당초 회사를 그만뒀겠지). 하지만 잉크 한두 방울로도 비커 전체를 시커멓게 만들 수 있다. 어쩌면 회사에 적응을 하고 못하고는 얼마만큼의 잉크 방울을 견뎌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었다. 회사 생활이 길어질수록 내가 견뎌야 하는 잉크 방울이 많아졌는데, 그만큼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잉크 농도가 짙어지면서, 내 머리에는 스트레스성 원형 탈모가 생겼다. 회사에 적응하고 견뎌내는 동안 머리에 구멍이 뚫린 것이었다. 병원에서 두피에 주사를 맞고 나오는데, 환경에 적응하면서 찢어진 이파리를 낸다는 몬스테라가 떠올랐다.

살아남기 위해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구멍 난 것은 같았는데, 몬스테라와 달리 내 머리는 보기 흉했다.
몬스테라 이파리는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주위 환경에 적응한 결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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