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7
*이 글은 짧은 소설입니다.
빗소리 말고는 모두 조용히 해주세요. 나를 어지러이 괴롭히는 사람들, 답답한 일들 모두 조용히 해주세요. 이토록 소리치고 싶은 재이였다.
"재이 씨는 영업이랑 기획 중에 뭐가 더 자신 있어요?" 네모난 턱을 가진 남자가 모나미 볼펜을 두어 번 돌리며 물었다. "... 아무래도 지원분야인 영업이 더 자신 있습니다." 순진한 재이는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럼, 기획은 영업보다 형편없다는 거네요?" 그 순간, 옆자리에 앉은 키 작은 남자가 예상치 못한 개그였다는 듯 푸학, 하고 웃는 것이었다. 재이는 입술을 질끈 물고 표정을 고치려 입꼬리를 괴이하게 끌어올리고 말했다. "하하.. 더 열심히 하려 노력하겠습니다." 쾅. 문을 닫고 계단을 내리자 평소 신지도 않던 7cm 구두 굽에 뭉개진 뒤꿈치 주름들이 더욱 쓰라렸다. 나를 비난하는 그 시간들조차 감사하게 느껴야 하는 현실에 처량함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울컥였다.
오늘도 재이의 하루는 낭비 혹은 반복되고 있었다. 카페에 가는 일이 부담스러워 졸업한 지 2년이 다되어가는 학교로 발걸음을 향했다. 버스는 여전히 제시각에 맞추어 정류장에 배달되고 있었고, 이전과 달라진 건 내가 느긋한 발걸음으로 버스에서 내려서 교문을 지나치는 모습뿐이었다. 학교에 다닐 적에는 뭐가 그리 바빴는지 늘 경보에 맞먹는 발걸음으로 뛰다시피 걷곤 했다. 이제는 재촉할 사람이 나뿐이니 새삼 여유가 없던 그 시절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지 싶다.
나를 마음껏 비난해도 좋으니, 그놈의 합격이라는 두 글자의 기쁨을 누릴 수만 있다면. 한순간의 얄궂은 평가라도 좋으니, 나에게 부족한 것을 알려줄 수만 있다면. 단지 그를 바랄 뿐이었다. 재이는 매일 다른 마음으로 살아간다. 어떤 하루였다. 기분 좋은 에너지가 샘솟아올라 뒤꿈치가 가볍게 들렸고, 밥알의 식감마저 재미나게 느껴졌다. 마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 순간들이 감동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의 노력들이 달콤하게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또 어떤 하루였다. 우연히 보게 된 친구들의 활짝 웃는 모습에 화가 나는 재이였다. 왜 너만 웃어? 너만 평온해? 아무 일이 없어 평온하지 않은 스스로가 우스꽝스럽고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생길 거야 좋은 일. 그런데 대체 언제?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오는 거야? 무지개가 뜨는 거야? 정말? 반복되는 공허한 물음에 목구멍이 턱 막히는 순간, 과잉되어버린 감정을 서둘러 짓누르며 내일의 계획을 세우는 어린아이였다.
재이에게 무어라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그 누구도 없었다. 단언컨대 재이를 재촉하는 사람도, 원망하는 사람도,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스스로에 대한 거대한 기대와 욕망이 그녀를 순간적으로 옭아매는 것이었다. 먼 바닷가에 홀로 서있는 섬, 재이는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어디서 본듯한 대사인데 마음에 맴도는 말이었다. '비난하지 마. 그 누구도 너를 비난할 수 없어. 그건 죄야.' 그리곤 토닥였다. 다시 토닥였다.
겁날 게 없는 밀림의 호랑이처럼 무던하며 용맹한 한 인간을 꿈꾼다. 호랑이는 양의 울음에 잠못이루지 않는다. 호랑이는 재이, 반대로 양 또한 재이다. 자꾸만 보들거리는 양의 살결처럼 약해지는 스스로의 이념들이 피어날 때마다 팔목을 잡아끌어 올리듯 일으켜주는 건 용감한 재이였다. 작아지는 말들에 시시콜콜하게 연연하지 않는 담담함. 지나가는 생각들에 아스러지지 않는 튼튼함이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 울음들을 손톱에 남아있는 물기를 털어내듯 툭. 떨어뜨리고 다시 내일을 깨어날 준비를 하는 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