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혼자여행이 아니다
여행 3일차
오전 5시. 불편한 잠자리 탓인지 이르게 눈을 떴다. 머리만 대면 자는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침대에서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다시 잠들기는 틀린 것 같아 일출시간을 검색했다. 오늘의 일출시간은 5시 51분. 해를 기다리며 넷플릭스를 켰다. 요즘은 뒤늦게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빠져 보고 있다. 똘망한 눈동자와 부스스한 머리로 숙소 문을 열었다. 흐린 날씨라 동그란 해는 아니었지만 붉으스름하게 물드는 하늘이 오늘의 시작을 알렸다.
고양이들이 인기척을 듣고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느긋한 아침이었다. 조식을 먹고, 어제 뵌 카페 사장님께 드릴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어제 처음 만난 언니에게 줄 편지도 썼다.
느긋한 준비 후 사장님의 마크라메 수업을 시작했다. 이 숙소를 예약하고 소소한 원데이 클래스들이 함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올해의 버킷리스트에 있던 원데이 클래스 장소가 제주라면 참 괜찮겠다.라는 생각에 곧장 신청했었다.
작은 의자 그리고 그 앞쪽에 엎어놓은 'ㄷ'자 모양의 바가 놓여있었다. 바에 매달린 나무막대에 두꺼운 흰색 실을 촘촘히 엮었다. 생각보다 간단하지만 집중력이 필요했다. 손에 힘을 주어 단단히 매듭을 지어야 다음 매듭을 지었을 때 뜨는 공간이 없다. 곧 이사 갈 새방에 예쁜 인테리어와 추억이 될 것 같아 잘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이 너무 컸을까, 오른쪽 검지 손가락에 작은 물집이 잡혔다.
차분한 말투의 사장님께서 차근차근 알려주시는 방법을 따랐다. 건너편 창문으로는 연한 푸른빛 바다가 보였고 매듭을 하나씩 걸어 나갈 때마다 생각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사장님께서 "방에 걸어놓으면 볼 때마다 오늘이 생각날 거예요."라고 하셨다. 그 순간을 상상하니 설렘이 다가왔다.
마크라메 매듭은 사실 한 가지 방법이다. 이 매듭 꼬임을 한 방향으로만 반복하면 둘둘 꼬인 짜임이, 양쪽으로 번갈아 반복하면 평평한 짜임이 완성된다. 맨 바깥쪽 매듭부터 점점 가운데로 모아가며 꼬아준다. 가장 짧아진 매듭이 마무리되면 얇은 실로 말아서 단단하게 묶어준다. 그리고 밑에 부분은 날카로운 빗으로 열심히 빗어주면 부드러운 실로 변신한다.
카페 사장님께 그림을 선물드렸다. 언니와 오늘은 제대로 된 점심을 먹으러 협재로 갔다. 혼자만의 여행이 될 줄 알았는데, 마음이 맞는 사람과 같은 추억을 공유할 수 있어 기뻤다. 먹고 싶었던 전복 문어 비빔밥 집을 찾아갔다. 아늑한 건물에 정갈한 플레이팅. 맛 또한 보는 그대로였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우린 이태원 맛집을 공유하며 맛있는 걸 참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해수욕장 근처 뚜이 카페에 갔다. 이국적인 카페에 친절한 사장님. 따뜻했다. 내 주홍빛 니트 색이 예쁘다며 칭찬해주셨다. 한라봉 에이드와 패션후르츠에이드를 주문했다. "언니 패션후르츠 좋아해요? 다들 안 좋아해서 나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라고 하자 사장님께서 "나도 너무 좋아하는 건데? 얼마나 맛있는데요!" 라며 대답하셨다.
패션후르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셋이나 모여있다니.
야외 테라스에서 또 몇 시간 수다를 나눴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각자의 방향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다시 만날 걸 기약했다. 오늘은 다음 숙소로. 서귀포행이다. 버스로 2시간 반.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창밖을 보며 멍 하기도 하고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하긴 일찍 일어났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래도 이따금 제주라는 걸 잊지 않으려 했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야자수는 당연한 게 아닌 풍경이다.
이따금 졸음에서 깨었을 때엔 내 주위에 아주머니들이 타고 있을 때도 있었고, 중학생들이 타고 있을 때도 있었다. 아이들이 시끌벅적할 때쯤 주위를 둘러보니 학교 정류장이었다. 운동장에서는 남자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학교를 다니는 건 어떨까.
가까스로 지친 몸을 이끌고 서귀포에 도착했다. 두 번째 숙소는 산속에 있어서 대중교통을 타고 온다면 픽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캐리어에 앉아 기다리자 차량이 도착했다. 젊은 남자분의 사장님이었다. 혼숙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시다가 여성전용을 찾으시는 손님분들이 많아 개업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이곳은 애월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온통 초록인 건 육지의 산과 비슷했지만, 귤나무의 주황색과 현무암의 검은색이 그만큼 많아 제주의 산이었다.
여행자의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는 내 모습에 "오늘 여행 첫날이세요?"라고 물으셨다. "아..ㅎㅎ 삼일째예요." 시골길을 굽이굽이 오르는 차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것저것 물으셨다. 게하 사장님은 다 차분한가?
아무튼 그런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도착이었다. 이런 데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따뜻한 불빛이 나오는 건물 앞에 멈췄다. 시골 마을 깊숙이 위치한 예쁜 건물이었다. 저녁쯤 도착하니 그 조명들이 더 예뻤다. 4인실이다. 2층 침대. 좀 무섭긴 하지만, 아늑하고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1층에 내려가 소파에 몸을 뉘이고 맥주와 피자를 먹었다. 영화와 함께. 이곳은 매일 밤 8시 영화를 상영한다. 아무도 없었다. 오늘의 영화는 <러브레터>.
너무 좋은데, 너무 피곤해서 완전한 행복을 느끼지 못한 게 좀 아쉽다. 얼른 자야겠다. 내일도 일찍 시작해야지.
행복한 하루의 일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