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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 자주 행복한 연습

일상을 설레게 만들기

by 윤수빈 Your Celine

여행 5일 차

오늘까지도 매일 아침 산책을 했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도시에서는 숲에 둘러싸여 나는 산내음을 맡으며 산책하기 어렵다. 이곳에서는 숲과 내가 주인공이었다. 4월답게 새들이 너도나도 지저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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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 드롭 서비스를 신청했는데, 제주시까지 가는 급행버스 시간에 맞춰 천천히 나가자고 사장님이 말했다. 그동안 로비에 앉아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정말 신기하게, 홀린 듯 넘어가는 페이지와 시선을 흡수시키는 문장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쓰는 건지. 그런데, 섹슈얼하고 자극적인 단어와 묘사들은 꼭 잘 나가는 소설들의 불가피한 요소여야 하는 걸까. 계속 읽게 되면서도 불편한 느낌이었다. 기분 좋은 소설의 초반부는 아니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서도 사장님이 인기척을 낼 때까지 독서를 멈출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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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주신 버스정류장에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버스가 왔고, 그렇게 편안한 길로 제주시에 도착했다. 하늘은 푸르게도 맑았으며 시원하기까지 했다. 그날의 날씨가 가장 잘 담긴 사진이다.


지인이 추천한 전복돌솥밥을 먹었다. 평일이라 웨이팅이 길지 않았고 너무 배가 고팠던 터라 맛있네 하며 먹었는데, 어느새 숭늉까지 다 먹었다. 정말 잘 먹었다. 적당히 배고픈 상태에서 먹었더라면 천천히 맛을 더 음미할 수 있었을 듯하다. 다음엔 부모님을 모시고 가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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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갑자기 흑백 셀프 사진이 생각났다. 버킷리스트였는데, 제주에서 찍고 갈까?

게다가 시간 예약도 딱 맞춰 됐다. 사진을 찍었다. 만족스럽다.

원본 그 자체가 너무 예쁜 모습으로 담겼다. 편안한 지금의 행복이 사진에 그대로 담겼다.


택시를 타고 가고 싶었던 '미스틱' 카페에 도착했다. 겉 외관은 평범했지만 안에 들어선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건 뭐 비밀정원 스케일이 어마어마했다. 초록색이 조금 여러 가지로 뒤덮여있었다. 아름답게. 큰 카페의 규모에 비해 사람도 많지 않았다. 공항에 있는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왠지 초록색을 보니 녹차가 먹고 싶어 녹차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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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피곤이 몰려왔다. 마지막 하루는 신라호텔로 정했다. 사실 마지막 날도 공항 근처 게스트하우스로 잡았었지만, 여행 첫날 불편한 잠자리 탓에 마지막 날은 다시 숙박을 잡을까 고민했다. 그 순간, 마지막 날짜에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연락이 왔다. 중복 예약으로 부득이하게 예약이 취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예약이 취소되었지만 기분 좋은 마음으로 호텔을 예약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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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마지막 날은 호텔로 돌아왔다. 씻으려는데 앗. 클렌징 오일이 없다. 밖으로 나와 제주시 중심거리에 있는 이니스프리에서 클렌징 티슈를 사 왔다. 제주시 거리는 서울과 같았다. 보도블록이 현무암이라는 것 빼고는?


씻고, 기절할 맛의 치킨과 맥주를 먹고 한참 TV를 봤다. 코로나로 인해 치킨과 맥주 픽업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맥주 2잔이 기본인데, 혼자니 두 잔 다 내 거다. 신이 났다. 여태 먹었던 치킨과 생맥주 중에 가장 행복한 식사였다. 역시 신라호텔은 음식이 최고. 혼자 한국 호텔에 있으니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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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행을 마치며.


가장 짧았던 5박 6일을 마치며 글을 쓴다. 마지막 제주 여행기를 쓰려니 뭔가 거창한 이야기들을 쏟아내야 할 것 같기도, 아쉬움을 내비쳐야 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먼저 이번 여행은 곱씹어볼수록 나에게 잔잔한 울렁임을 주었다. 운이 정말 좋은 순간들이 반복되기도 했다.

여행의 중간 요일인 수, 목요일 흐리고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는 빗나갔다. 3일 맑고 4일 비가 온다는 제주도가 아닌가.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이틀만 흐린 게 어디야 비 내리면 좋아!'라고 생각했는데, 맑은 날의 연속 와중에 잠시 흐릴 뿐이었다.

여행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 호텔 창가에 빗방울이 꽂히는 소리가 투둑 투둑 들려온다. 오늘은 맑은 날이었다. 마지막 날을 장식하듯, 참았던 비가 내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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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순간을 떠올려도 몽글해지는 추억이다. 벌써 추억이다. 지나간 시간은 더욱 아름답게 왜곡되길 바랄 뿐이다. 다만, 그 시간 안에서 얻은 것은 조금은 내려놓아도 좋다는 것. 모두가 불안하기에,

그 안에서 얼마만큼의 행복을 찾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적어도, 스스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 먼 길을 과감히 떠나온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미이다.


내가 이번에 갑작스레 제주로 떠나온 건, 마음을 다잡고 시작할 때 방청소를 하듯. 새로운 일을 집중해서 시작할 때 책상 정리를 하듯, 몸과 머리를 비워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비행기에 오른 순간, 모든 고민들을 그 밑에 털어냈다.

6일간 깨달은 건, 이 세상의 곳곳에서는 이렇게 빛나는 순간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내가 발견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러니 넓은 눈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자.

행복하지만은 못할 때가 더 많다고 생각할 때도 있겠지만, 괜찮다. 그럴 땐 다시 떠나면 된다.

멀리서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다시 넓혀주면 된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좋아하는 것들을 좇으며 나를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설레게 하기를 약속했다.

돌아가도 괜찮다. "혹시 알아, 더 좋은 일을 만나게 될지도."

현재에 충실하면 된다. 이렇게 벅찬 여행은 반복된 일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란 걸 안다.

그러니 일상을 더 설레게 만들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에, 설레는 일에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아, 그리고 하루를 일찍 시작하기로 했다. 아침잠이 많은 나에겐 늘 힘든 숙제이지만

일찍 일어났을 때, 그렇지 못했을 때 보지 못한 풍경을 보게 되었다. 그건 분명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어디선가 고양이들도 함께 보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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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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