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수빈 Your Celine Jul 02. 2021

제주 | 자주 행복한 연습

일상을 설레게 만들기

여행 5일 차

오늘까지도 매일 아침 산책을 했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도시에서는 숲에 둘러싸여 나는 산내음을 맡으며 산책하기 어렵다. 이곳에서는 숲과 내가 주인공이었다. 4월답게 새들이 너도나도 지저귀곤 했다.



돌아가는 길 드롭 서비스를 신청했는데, 제주시까지 가는 급행버스 시간에 맞춰 천천히 나가자고 사장님이 말했다. 그동안 로비에 앉아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정말 신기하게, 홀린 듯 넘어가는 페이지와 시선을 흡수시키는 문장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쓰는 건지. 그런데, 섹슈얼하고 자극적인 단어와 묘사들은 꼭 잘 나가는 소설들의 불가피한 요소여야 하는 걸까. 계속 읽게 되면서도 불편한 느낌이었다. 기분 좋은 소설의 초반부는 아니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서도 사장님이 인기척을 낼 때까지 독서를 멈출 순 없었다.



내려주신 버스정류장에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버스가 왔고, 그렇게 편안한 길로 제주시에 도착했다. 하늘은 푸르게도 맑았으며 시원하기까지 했다. 그날의 날씨가 가장 잘 담긴 사진이다.


지인이 추천한 전복돌솥밥을 먹었다. 평일이라 웨이팅이 길지 않았고 너무 배가 고팠던 터라 맛있네 하며 먹었는데, 어느새 숭늉까지 다 먹었다. 정말 잘 먹었다. 적당히 배고픈 상태에서 먹었더라면 천천히 맛을 더 음미할 수 있었을 듯하다. 다음엔 부모님을 모시고 가도 좋겠다.



어젯밤 갑자기 흑백 셀프 사진이 생각났다. 버킷리스트였는데, 제주에서 찍고 갈까?

게다가 시간 예약도 딱 맞춰 됐다. 사진을 찍었다. 만족스럽다. 

원본 그 자체가 너무 예쁜 모습으로 담겼다. 편안한 지금의 행복이 사진에 그대로 담겼다. 


택시를 타고 가고 싶었던 '미스틱' 카페에 도착했다. 겉 외관은 평범했지만 안에 들어선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건 뭐 비밀정원 스케일이 어마어마했다. 초록색이 조금 여러 가지로 뒤덮여있었다. 아름답게. 큰 카페의 규모에 비해 사람도 많지 않았다. 공항에 있는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왠지 초록색을 보니 녹차가 먹고 싶어 녹차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멍-



조금 피곤이 몰려왔다. 마지막 하루는 신라호텔로 정했다. 사실 마지막 날도 공항 근처 게스트하우스로 잡았었지만, 여행 첫날 불편한 잠자리 탓에 마지막 날은 다시 숙박을 잡을까 고민했다. 그 순간, 마지막 날짜에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연락이 왔다. 중복 예약으로 부득이하게 예약이 취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예약이 취소되었지만 기분 좋은 마음으로 호텔을 예약했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은 호텔로 돌아왔다. 씻으려는데 앗. 클렌징 오일이 없다. 밖으로 나와 제주시 중심거리에 있는 이니스프리에서 클렌징 티슈를 사 왔다. 제주시 거리는 서울과 같았다. 보도블록이 현무암이라는 것 빼고는?


씻고, 기절할 맛의 치킨과 맥주를 먹고 한참 TV를 봤다. 코로나로 인해 치킨과 맥주 픽업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맥주 2잔이 기본인데, 혼자니 두 잔 다 내 거다. 신이 났다. 여태 먹었던 치킨과 생맥주 중에 가장 행복한 식사였다. 역시 신라호텔은 음식이 최고. 혼자 한국 호텔에 있으니 이상하다. 






제주 여행을 마치며.


가장 짧았던 5박 6일을 마치며 글을 쓴다. 마지막 제주 여행기를 쓰려니 뭔가 거창한 이야기들을 쏟아내야 할 것 같기도, 아쉬움을 내비쳐야 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먼저 이번 여행은 곱씹어볼수록 나에게 잔잔한 울렁임을 주었다. 운이 정말 좋은 순간들이 반복되기도 했다. 

여행의 중간 요일인 수, 목요일 흐리고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는 빗나갔다. 3일 맑고 4일 비가 온다는 제주도가 아닌가.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이틀만 흐린 게 어디야 비 내리면 좋아!'라고 생각했는데, 맑은 날의 연속 와중에 잠시 흐릴 뿐이었다. 

여행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 호텔 창가에 빗방울이 꽂히는 소리가 투둑 투둑 들려온다. 오늘은 맑은 날이었다. 마지막 날을 장식하듯, 참았던 비가 내려줬다.



어떤 순간을 떠올려도 몽글해지는 추억이다. 벌써 추억이다. 지나간 시간은 더욱 아름답게 왜곡되길 바랄 뿐이다. 다만, 그 시간 안에서 얻은 것은 조금은 내려놓아도 좋다는 것. 모두가 불안하기에,

그 안에서 얼마만큼의 행복을 찾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적어도, 스스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 먼 길을 과감히 떠나온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미이다. 


내가 이번에 갑작스레 제주로 떠나온 건, 마음을 다잡고 시작할 때 방청소를 하듯. 새로운 일을 집중해서 시작할 때 책상 정리를 하듯, 몸과 머리를 비워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비행기에 오른 순간, 모든 고민들을 그 밑에 털어냈다.

6일간 깨달은 건, 이 세상의 곳곳에서는 이렇게 빛나는 순간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내가 발견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러니 넓은 눈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자. 

행복하지만은 못할 때가 더 많다고 생각할 때도 있겠지만, 괜찮다. 그럴 땐 다시 떠나면 된다. 

멀리서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다시 넓혀주면 된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좋아하는 것들을 좇으며 나를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설레게 하기를 약속했다.

돌아가도 괜찮다. "혹시 알아, 더 좋은 일을 만나게 될지도."

현재에 충실하면 된다. 이렇게 벅찬 여행은 반복된 일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란 걸 안다. 

그러니 일상을 더 설레게 만들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에, 설레는 일에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아, 그리고 하루를 일찍 시작하기로 했다. 아침잠이 많은 나에겐 늘 힘든 숙제이지만

일찍 일어났을 때, 그렇지 못했을 때 보지 못한 풍경을 보게 되었다. 그건 분명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어디선가 고양이들도 함께 보고 있을지도.


굿바이, 제주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 | 쉬어가도 괜찮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