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푼 마음을 지그시 누르는 힘
정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만한 이야기. 나이가 어릴수록 인간관계에 있어 재는 것이 없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호감 가는 사람에게 손에 들린 것을 선뜻 내어주기도 하고 낯선 이에게 두 팔 벌려 품을 허락하기도 한다.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사람인지 가늠할 새도 없이 말이다. 청소년기에는 비교적 다양한 또래들을 만나게 된다. 자신만의 비밀이 생기고, 그것을 선뜻 꺼내어 보일 수 있는 깊은 사이의 친구가 생긴다. 친한 사람과 비교적 덜 친한 사람이 생겨나면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청소년기에 아이들 사이에서 싸움이 잦은 이유는, 인간관계를 다루는 능력이 어리숙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내어주며 이야기한 속마음이 약점이 되고 옮겨지는 이야기들은 왜곡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내가 처음 마음을 열었던 모습이 상대방의 진실된 모습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고, 결국 상처받게 된다. 학교생활에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없다. 때문에 불편하고 상처가 되는 마음들을 애써 숨겨가며 가면을 쓰는 경우도 있다.
진실되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친구를 만난다면, 그만큼 기쁜 일이 없다. 상대방이 나의 운명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에 취해 너무 가까워지는 순간 서로를 구속하여 독이 되는 관계로 변질되기도 한다. 이런 일, 저런 일을 겪으며 어른이 되었을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0대가 되자 나이대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람'이란 성적인 이성이 아닌 '여성'과 '남성'을 가진 일반적 사람들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많은 대로, 직위가 높은 사람들은 높은대로 낯설고 어려웠다. 그들이 나와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 했을 때 무참히 가까워지곤 했다. 그 당시에는 나도 그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관계마다 유지되는 거리의 선택권이 나에게 없었다는 것을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반대로 그 사람의 첫인상에 푹 빠져 온 마음을 다 주려고 했던 적도 많았다. 친한 관계임을 증명하고 싶어 굳이 필요치 않은 정보들을 공개했으며 잦은 연락을 애써 이어갔다. 하지만 첫인상이 전부인 경우는 없다. 그것은 순전히 나에게만 해당되는 찰나의 순간이자 섣부른 판단에 가깝다. 부푼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섣부르게 행동했을 수 있다. 상대방의 실체를 알고 난 후에는 이미 나의 많은 것들을 공개한 이후이거나, 상대방의 마음은 나와 같지 않았다는 사실이라도 깨닫게 된다면 괜한 공허함을 얻게 될 것이다.
인간관계마다의 거리감을 정하는 것은 본인이다. 따라서 상대의 거리나 속도에 굳이 맞출 필요도 없다. 나는 첫인상이 좋은 사람일수록 더 조심하려 한다. 이 사람과의 관계가 천천히, 오래 진전될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는 방법을 택한다. 부푼 마음을 지그시 누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애써 보이지 않으며 자연스럽고 편안함을 지킬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언제라도 이어지기 마련이다. 연인관계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좋은 사람이라 생각될수록, 천천히 부드럽게 다가가야 한다. 오히려 마음을 누르는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