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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Feb 11. 2022

진짜 '어른'을 만난 적이 있나요

나는 나보다 여린 사람에게 얼마큼 너그러울 수 있는가

때는 21살, 또래가 아닌 먼저 이 나이를 거쳐간 사람들을 가까이서 접하는 게 아직은 낯설면서도 묘한 존경심 따위까지 느껴지는 나이였다. 지금은 나이가 곧 지혜의 양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어쨌든, 그 당시 대학교 2학년의 눈에 가장 멋져 보이는 한 여자 선배가 있었다. 학내 방송국에서 만나게 된 한참 선배였다. 학년은 4학년이었지만, 외국에서 살다 온 탓에 나이는 6살이나 많았다. 21살에게 27살은 성숙함의 대명사라고도 할 만큼 멋진 나이였다. 


학내 방송국에서는 꼰대 같지만 '언니' 대신 '선배'라는 호칭을 써야 했는데, 그 사람만큼은 이름 뒤에 호칭을 붙여 완성된 '유진 선배'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뭘 하든 능숙해 보이고 싶지만 어색함을 감출 수 없는 어린 나의 모습과는 정말 달라 보였다. 한 학년 위의 선배들을 부드럽게 휘어잡는 카리스마에 뭐든 못할 게 없어 보이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한 번은 10살이나 많은 선배라는 남자가 방송국에 찾아와서는, 대뜸 군대마냥 관등성명을 대보라고 시키더니 나보다 어린 후배들 앞에서 '너 방송한 거 봐봐. 너같이 해서 뭘 아나운서를 하겠다 그래~ 야, 얘 선배라고 하지 마라.'라는 식의 온갖 모욕을 주고 떠났다. 그 사람은 한때 방송기자를 꿈꿨던 신문기자였다. 참 지금 생각해 보면 안쓰러운 사람이다. 자신의 부족함이 만든 열등감을 10살이나 어린애들에게 같잖은 선배 짓거리 따위로 해소하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인생에서 겪어본 적 없는 거대한 수치심을 느꼈다. 한 살밖에 많지 않지만 좋은 선배가 되고 싶었던 마음이 꽤 대단했다. 이런 분노와 억울한 감정을 다룰 줄 모른 채 겉으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괜찮은 척을 할 뿐이었다. 이 사실이 퍼져 유진 선배에게도 전해지게 되었다. 

연락 한번 해본 적 없는 선배에게 늦은 저녁 전화가 왔다. 그렇게 나는 "괜찮아요!"라는 어색한 웃음으로 시작한 대화에서 펑펑 쏟은 눈물의 양만큼 위로를 받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그때 선배가 나에게 정확히 어떤 말들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하게 잘못된 사람을 비난하며 위로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그런 짓을 한 건지, 너는 어떤 방향으로 생각을 해야 하는지 지혜롭게 알려주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이 꼭 잘못되었으면 좋겠다는 악한 마음을 놓아주게 되었다. 그저 내가 평온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른'의 생각을 전해 받는 순간이었다.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친한 사이가 아니니 안타깝다는 마음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진심의 손길을 건네준 것이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이제 그 당시의 선배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그때의 선배의 행동들은 그저 너그러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타인의 마음을 내 빈 공간을 할애해 채울 줄 아는 너그러움도 있지만, 어리숙한 나이를 지나온 사람으로서 이해하는 과거의 동질감 같은 것들이 강하게 든다. 


처음부터 단단한 사람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지나오며 자신만의 짙은 견해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나 또한 참 많이 변했다.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이 더 많다는 게 나를 설레게 만든다. 이후로도 몇몇 '어른'들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어리숙한 순간에 만난 어른이었기에 그때가 가장 떠오른다. 어린 나이에, 그녀를 만나게 되어 감사하다.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나보다 여린 사람에게 얼마큼 너그러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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