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가기 싫은 날〉1.
목사는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내가 곁을 지날 때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누군가와 다정히 대화를 나누다 나를 보면 미소를 거뒀다. ‘떠날 때가 됐구나.’ 손끝이 아렸다. 2019년 봄, 어렵게 내 생각을 목사에게 건넸다. 돌아온 것은 말의 화살. ‘내 잘못이라고, 내 안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괜히 아파하는 거라고, 아무도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내가 이상한 거라고….’ 마음을 찍었다. 괜찮다 도닥였지만, 그 말은 몇 번이고 되살아나 가슴을 베었다. 지우려 할수록 그날의 차가운 공기, 시린 손발의 느낌까지 선명해졌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었다.
이미 교회를 떠난 사람도 여럿, 떠날 채비를 하는 이도 보였다. 목사는 정의를 말했지만 떠난 이는 정의 밖의 사람이었다. 빈자리에 사라진 이들의 하소연이 고였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결국 목사를 떠나는 것이다. 목사는 신학적 논쟁을 즐겼고, 기필코 가르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살피기 전에 그것은 잘못된 생각, 그러니 당신은 틀린 사람이라고 일러주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자신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 그의 유일한 임무는 설교였다. 말씀 중심의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물으면, “구체적인 삶은 성도의 몫이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읽고 말하며 과연 살고 있었을까.
나는 선임 장로의 며느리, 성가대 지휘자의 아내였다. 두 계절을 보내고 그해 겨울, 목사에게 긴 글을 보냈다. 그를 이해해 보겠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신앙의 고민이 많다고, 목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메일로 상담하기를 요청했다. 그도 이미 책을 냈기에 글로 소통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듯했다. 무엇보다 그를 마주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두려웠다. 울지 않고 공손히 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목사는 거절했다. 자신에게 그럴 에너지가 없다고, 이미 처한 상황이 힘들다고 했다. 주르륵, 한 영혼이 미끄러졌다.
교회에서 돌아온 오후에는 기분이 습해져 남편과 어김없이 싸웠다. “이제 그 말 좀 그만해.” “어쩔 수 없잖아요.” 무거운 마음을 어쩌지 못해 서로의 위로를 구하다 등을 돌렸다. 불똥이 아이들에게 튀어 “너희 그만 좀 싸워”라고 소리 지르면, 두 아이는 쥐 죽은 듯했다. 주일 오후의 지옥, 우리는 매주 지옥을 받으러 교회에 갔다. 내가 먼저 목사의 설교를 불편해했지만, 먼저 돌아선 것은 남편이었다. 남편의 조각난 마음은 고스란히 내 것이었다. 남편은 마음결이 고운 사람이다. 예민하게 살펴 상처는 덜 주되, 날카롭게 받아들여 더 아파했다. 남편은 밤마다 동굴로 들어갔다. 무엇이 문제인지 말을 하라고 재촉하면, 교회와 우리의 문제가 나와 남편의 문제로 번졌다.
나와 목사, 둘만의 문제였다면 어떻게든 나를 설득해 그곳에 남았을 것이다. ‘올해까지는 다니자’ 합의했지만, 남편은 날마다 흔들렸다. 코로나 19로 교회를 가지 않는 동안 다른 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렸다. 신기하게 삶에 점점 윤기가 흘렀다. 남편은 살이 빠졌고, 나는 눈빛이 선해졌다. 애쓰지 않고 더 많이 웃었다. 잠시 코로나 19 상황이 괜찮아져 두 달 만에 교회에 갔다. 풀만 무성할 뿐, 봄은 온데간데없었다. 참 긴 한 달, 우리는 꾸역꾸역 자리를 지켰다. 여름이 채 오지 않은 5월의 마지막 날, 남편이 성가 대원들에게 말했다. “지휘를 그만 두겠습니다.”
딸아이가 차에 타며 말했다. “엄마, 나는 이 교회를 계속 다니고 싶어.” 목이 뜨거웠다. ‘아이는 다 듣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왜?”라고 물었다. “사람들이 다 우리 예뻐해 주잖아. 나는 여기가 좋아.” 나 또한 갑작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나’를 버리는 일이었다. 봉사하지 않고, 십일조 하지 않고, 서로 아끼던 이들을 떠나 잘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도 될까. 과연 삶이 살아지기는 할까. 늘 그랬듯 우리의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채워질 것이다.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헐떡였다. 함께 준비하던 교회 행사, 삶을 나누던 청년들, 밤을 지새며 울고 웃던 시간들, 그것 또한 놓아야 했다.
정처 없이 걸었다. 사실 4년 전부터 시작된 문제였다. 2년은 갸우뚱했고, 2년은 마지못해 견뎠다. ‘걷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야.’ ‘다를 뿐 틀린 건 아니야.’ 나를 안아주기도 했다. ‘넌 뭐가 그렇게 잘났니?’ ‘다들 아무렇지 안다고 하잖아.’ 가끔은 나를 몰아붙였다. 목사와 사모에게 책을 건네고, 편지를 보내고, 찾아갔다. 긴 여정의 끝은 이별. 떠밀리듯 떠나온, 스스로는 가지 않았을 길이다. 내가 걷지 않고는 몰랐을 마음, 이 길에 베인 분노, 눈물, 한숨, 배신, 떨림을 오롯이 내 것으로 떠안는다. 그제야 먼저 간 이들의 발자국이 보인다. 어쩌면 내 영혼이 미끄러진 곳은 나락이 아니라 와락이었을까. 와락 안기고 싶은 그분의 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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