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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ug 19. 2022

나는 돈 없는 죄인이었다

〈교회 가기 싫은 날〉2.

목사의 설교는 성경을 인용하는 대중 강연 같았다. 서두는 보통 책이나 신문, 뉴스나 유튜브에 나온 사람 이야기였다. 배우, 의사, 작가, 상인 등 직업군은 다양했지만, 사랑의 실천이라는 면에서 동일했다. 자신보다 이웃을 챙기는 이들은 많았다. 평생 호떡 장사를 한 할머니가 전 재산을 기부한 예화에 코끝이 시큰해지면, 목사는 그에 못 미치는 내 삶을 들춰냈다. 감동의 끝은 회개였다. 목사는 말했다. “여러분은 왜 아픈 사람의 이웃이 되지 못합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설교 중반부는 성경 인물에 대한 이야기,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조금씩 달랐지만, 결론은 비슷했다. “힘들고 가난한 자들 옆에 서지 않은 것은 죄입니다.” 축도를 마치고 본당 문을 나서는 나는 언제나 돈 없는 ‘죄인’이었다.


목사는 세상을 강자와 약자로 나눴다. 장애가 있는 교회 청년은 약자의 상징이었다. 청년은 작곡가이자 음악 PD이다. 2년 전, 남편이 쓴 가사에 청년을 음을 입혀 CCM 음반을 냈다. 목사가 발매 소식을 전하며 말했다. “이 청년이 계속 음악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 쉬운 방법이 있어요. 돈 내세요.” 남편과 청년이 음악 작업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내는 음반이었다. 곡을 만들고, 연주자를 찾고, 미디를 제작하고, 가수를 섭외하고, 믹싱과 마스터링을 거쳐 유통하기까지 여러 갈등이 있었다. 딸아이의 사진을 앨범 표지로 정하고, 어디에 제목을 넣을까 택하는 것도 각자 의견이 달랐다. 제작비보다 더 어려운 것은 다투며 단단해지는 시간이었다. 남편은 청년을 돕지 않았다. 가끔 싸우면서도, 그저 함께 걸었다.


어린 시절, 우리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평생 목업(Mock-up) 일을 했다. 물건을 생산하기 전에 실물 크기의 모형을 미리 만드는 것이었다. 개발 단계의 일이라 종종 돈을 받지 못했다. 물건을 납품했는데, 생산이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돈 대신 물건을 받아오기도 했다. 살림살이는 빠듯했고, 자주 통장 잔고가 바닥났다. 엄마는 집에 갑자기 손님이 오면 아랫집에서 돈을 빌렸다.


준비물 살 돈이 없었다. 오십 원짜리 도화지는 괜찮았지만, 삼천 원이 넘는 과학 준비물은 말하기가 겁났다. “나 삼천 원만.” 어렵게 입을 달싹거리면, 엄마는 텅 빈 지갑을 보여주며, 아버지를 가리켰다. 아버지 앞에 서면, 말이 목구멍에서 나올락 말락 했다. 학교 앞에서 떡볶이를 사 먹고, 여름이면 슬러시, 겨울이면 붕어빵을 사 먹는 내가 죄스러웠다. 돈이 없는 부모에게 매번 돈을 받아야만 하는 나 자신이 누추했다.


대학 시절, 아침마다 아버지 차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가는 동안 “버스 카드 충전하게 만 원만 주세요.”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라디오 노래 끝나면 말해야지’, ‘이 신호만 바뀌면 말해야지’ 몇 번을 옴짝 댔다. 아버지는 별말 없이 돈을 주었지만, 필요한 돈의 액수가 커질수록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돈은 금세 사라졌고, “벌써 다 썼어?”라는 말에 고개를 떨궜다.


과외를 시작했다. 들어오는 과외는 모두 소화 했고, ‘과외 부자’라 불리며 바쁘게 살았다. 움직인 만큼 돈이 되니, 잠을 줄어서라도 벌어야 했다. 더 이상 돈 때문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 집안 행사가 있는 날이면 내가 계산을 했다. 누구보다 빨리 경제적으로 독립한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잘 버는 만큼 서슴 없이 썼다.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별 고민 없이 사고, 한두 번 입다가 버리기도 했다.


헌금을 많이 했다. 십일조뿐 아니라, 맥추 감사, 추수감사, 성탄 감사, 부흥회 헌금을 꼬박꼬박 냈다. 중고등부 교사를 하며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썼다. 고등부 임원 여섯 명을 데리고 빕스에 갔던 날, 접시가 천장까지 싸였다. 그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복 받아 원하는 곳에 취직하고 싶었다. 자신이 가진 돈 전부를 헌금하고, 서울대에 들어갔다는 A의 간증이 내 이야기이길 바랐다.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돈’에서 멀어져,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삶으로 나아갔다. 내 몸을 혹사시켜,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돈 내세요.”, “기부하세요.”라는 목사의 설교가 가슴에 얹혀 내려가지 않은 것이. 두 렙돈,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 옆에 서면 나는 작아졌다.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내는 삶이 옳은 삶일까. 그것만이 사랑일까.’ 부대꼈다.  


  나는 돈 때문에 불편하지 않다. 멋진 차, 명품 가방은 없지만, 안전한 집에서 하루 세 끼 굶지 않고 산다. 계절마다 유행하는 옷도 사 입는다. 하지만 부모님의 가난은 여전하다. 엄마는 아직도 돈 때문에 종종거린다. 선물을 받거나, 식당에 가면 “이거 얼마야?”라고 묻는다. 부모님은 빠르면 2년, 늦으면 4면마다 이사를 한다. 17년 전, 다세대주택을 팔고, 전세로 옮긴 게 문제였다. 집값은 치솟았고, 집은 점점 옹색해졌다. 전셋집의 좁고 가파른 계단은 불안하다. ‘돈’으로 보면 아버지 인생은 실패였다. 아버지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노동을 한다. 일이 없어서, 사무실 임대비 걱정을 하는 뒷모습이 쓸쓸하다. 젊었을 때 더 많이 모아두지 못한 죄일까.


목사는 전교인이 사회복지사가 되길 바랐다. 그의 예수는 선교와 구제를 위해 이 땅에 온 듯했다. 2019년 사순절, 주보에 목사의 노숙인 심방 소식이 실렸다. 고난주간이 시작되자, 목사는 노숙인에게 간식과 물품을 전달하는 공동체를 찾아갔고, 교회 이름으로 선교비를 전달했다. 그는 설교 시간에 서울 쪽방촌에서 보낸 하루와 노숙인의 처지를 전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결론은 간단했다. “돕는 거 어렵지 않아요. 돈 보내면 됩니다.” 그는 그 후 노숙인을 다시 만났을까. 매년 교회 재정에서 선교비를 늘리는 일이 그의 중요한 임무였다.


코로나 이후, 처음 모인 대면 예배에서 목사가 말했다. “코로나로 정말 힘든 사람은 가난한 이들입니다. 방법이 있어요. 기부하세요.” 그의 도움은 오직 ‘돈’에서 왔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학생이 암에 걸리자, 그는 SNS에 후원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그 글이 금세 사라진 이유는 짐작할 만하다. 그가 말하는 약자는 흐릿했고, 돕는다는 말은 불편했다. 예수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마 22:39)라고 했지만, 과연 그 ‘사랑’이 돈일까. ‘돕는다’라는 말에는 상하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도움받는 이는 어쩔 수 없이 도움 주는 이의 통제 아래에 놓인다. 교회 후원을 받는 한 분은 “한 달에 5만 원이면 큰돈이지.”라며 목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결혼, 출산, 이사, 심지어 투병, 죽음까지도 돈으로 도왔다.


얼마 전, 친정에서 가정 예배를 드렸다. 아버지가 “노년에 머물 집을 주시고….”라는 기도를 드렸다. 예배가 끝난 뒤, 엄마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 복 받아서 잘 살아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내가 답했다. “돈으로 평가하면, 두 분 인생이 작게 느껴질 텐데, 그것 말고는 성공한 인생이에요. 신앙 안에서 잘 살고 있잖아요.”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아버지는 쑥스럽게 웃었다. 그 말은 사실 나에게 한 말이었다. 더 이상 돈 없인 ‘죄인’으로 살지 말라고, 내가 나에게 건넨 말. 사랑은 ‘돈’에서 오지 않는다.


Photo by micheile dot co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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