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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04. 2023

교회는 추웠다

〈교회 가기 싫은 날〉3.

교회는 겨울에 얼어붙었다. 화장실은 1년 내내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주일 아침 교육관은 겉옷을 입으면 견딜 정도였지만, 다른 날은 냉기로 가득했다. 평일 저녁, 공부방으로 모여 밥을 먹으면, 돼지고기에 하얀 기름이 꼈다. 아무리 두꺼운 양말을 신어도 발이 얼었다. 아이들이 말했다. “선생님, 손이 얼어서 문제를 못 풀겠어요.” 


수요일에는 팰릿 난로 주위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한 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 두 볼이 찡하고,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 전교인이 50명 남짓한 시골 교회 특성상 예배드리는 분은 대부분 일흔, 여든 즈음의 어른들이었다. 모두 등받이 없는 벤치 의자에 앉아 웃풍을 온몸으로 견뎠다. 모자를 쓰고, 외투로 싸매고, 이불을 덮어도 시간은 더디 흘렀다. 2018년 2월에는 교회가 얼었다. 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대가로 몇 배의 돈을 썼지만, 상수도는 녹지 않았다.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따뜻함을 찾아 헤맨 인생이었다. 내가 살던 15평 다세대 주택은 밤이면 벽으로 찬 바람이 스몄다. 자려고 누우면 코끝이 시렸다. 빨간 코를 붙잡고 이불 속으로 얼굴을 넣었다가, 답답해서 이불 밖으로 꺼냈다가를 반복했다. 익숙한 겨울 아침 풍경이 있다. 아버지가 붉은 양동이를 옆에 놓고 물을 짜는 장면이다. 하룻밤 사이 거실 창문 쪽 천장에 맺힌 물방울을 닦는 것이 아버지의 첫 일과였다. 겨울을 견뎠다. 내복을 입고, 스웨터를 걸치고, 물주머니를 품고, 이불을 둘렀다. 


20년 만에 이사를 했을 때, 화장실을 보고 마음이 녹았다. 샤워를 할 때, 몸을 발발 떨며 재촉하지 않아도 되었다. 뜨듯한 물에 잠시 몸이 녹았다. ‘조금만 더’라며 더운물을 뿌리다 보면 화장실이 온통 뿌옜다. 문을 열 때는 하얀 김이 퐁퐁 새어 나와 부모님에게 한 소리 들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생에 처음 만난 따뜻함이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추웠던 어린 시절이었기에…. 늘 따사로운 누군가를 그렸다. 그것을 교회에 바란 것은 지난친 것이었을까. 


목사는 무엇이든 아꼈다. 연필과 종이, 전기와 기름을 절약했다. 달력은 A4용지가 되었다. 목사는 지난 달력을 210×297 크기로 잘라 복사기에 넣어놓았다. ‘종이 걸림’은 복사하는 이의 몫이었다. 보험 회사에 얻은 이면지도 썼는데, 성가대 악보 뒤에 적힌 누군가의 주민등록 번호는 모르는 척해야 했다. 교회 현판은 어두웠고, 십자가는 꺼져있었다. 한껏 장식한 성탄절 전구는 겨우내 동네를 밝히지 못했다. 어쩌면 청빈과 인색은 같은 말이었다. 


목사는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설교 준비에 쏟았다. 그가 자랑스레 말했다. “어떤 목사님은 자기 시간의 90%를 설교 준비에 쓴대요. 정말 닮고 싶습니다.” 교회를 떠날 때, 모두 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사님 설교가 좋잖아.” 관주, 주석, 헬라어를 넘나드는 해설부터 성경 본문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까지 그는 괜찮은 ‘설교자’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나요?’라고 묻기 시작한 것이. 그가 말하는 약자, 장애인, 공동체 같은 말이 힘을 잃고 바스러졌다. 설교의 결론인 사랑, 믿음, 소망 같은 말들이 글자 안에 갇혔다. 그의 설교는 추상적이었다. 그는 사랑해보지 않은 사랑, 믿어보지 않은 믿음, 품어보지 않은 소망을 말했다. 


목사의 유일한 세계는 컴퓨터 놓인 책상이었다. 그는 교회에서 하는 행사에 대부분 비 주도적이었는데, 교회 홈페이지 관리만큼은 열을 올렸다. 네이버에 카페를 만들고, 가입을 독려하고, 글을 요청했다. 일흔 넘은 권사님을 붙잡고, 카페 가입을 돕고, 글 올리는 방법을 가르쳤다. 2017년 겨울에는 설교 본문을 미리 올리고, 댓글로 의견을 나누는 ‘공동체 설교’를 시작했다. 처음 네다섯 명 달던 댓글은 점점 줄어서 어느 순간부터 목사만 달았다. 목사는 설교 시간에 동기 목사 카톡방, 페이스북에서 나눈 이야기도 자주 인용했다. 인터넷이 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사랑해본 사랑은 안다. 사랑에는 돈보다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오랜 시간 투병하던 집사님이 소천한 날이었다. 이른 아침 장례 소식을 들었고, 저녁에 입관 예배가 있었다. 그날 본 목사의 등산 양말이 잊히지 않는다. 장례식장과 사택은 10분 거리인데, 종일 무엇이 그리 바빴을까. 문득 5년 전, 할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왔을 때, 목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집사님, 장례식 가려고 했는데 다른 일이 있어서 못 갔네요.” 그는 과연 사랑했을까. 누군가 죽음 옆에서 처절하게 울고 있을 때조차 그는 읽고, 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사랑해보지 않은 사랑은 외칠 것이 구제밖에 없었다. 


남편이 중고등부 부장과 성가대 지휘를 그만둔다고 하자, 여러 사람이 찾아왔다. 목사는 오지 않았다. ‘10년 알던 친구와 멀어져도 전화 한 번은 할 텐데….’ 연락을 기다리는 내가 바보였다. 떠나기 전, 나는 목사와 사모에게 여러 번 손을 내밀었고, 거절당했다. ‘주보 표지의 지휘자 이름을 내릴 때, 그때는 한 번 물었어야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만나면 뭐라 말할까 상상하곤 했다. 모두 그렇게 떠났고, 흔적 없이 묻혔다. 나라고 다를 것 없었다. 서운함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싸움조차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치자, 목사는 자전거 핸들을 꺾었다. 마트에서 사모를 봤을 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10년 동안 말한 사랑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목사는 추웠다.


Photo by Aaron Burd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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