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Feb 09. 2023

당신을 미워하기로 했다

〈교회 가기 싫은 날〉5.

  설교는 강단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만, 설교자는 강단에서 내려와 계속 그 설교를 살아가야 합니다. 설교자가 말씀의 칼날을 첫 번째로 들이대야 하는 상대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설교의 내용은 항상 설교자의 삶보다 앞서갑니다. 그 괴리를 어쩔 수 없지만, 설교자는 회중의 어느 누구보다 그 괴리를 좁히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김영복, 《설교자의 일주일》, (복 있는 사람, 2017), 404쪽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김광진의 〈편지〉, 늘 듣던 노래에 가슴이 멈칫했다.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 두고서” 가사에 안겨 하염없이 울었다.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도 수없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긴 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잠들지 못한 날이 얼마일까. 이제 떠나자고, 그만 생각하자고 밤마다 나를 달랬다. 연애 시절 남편과 헤어졌을 때도 듣지 않은 이별 노래를 매일 들었다. 미워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품이 드는 일이었다.


  내가 감히, 목사를 미워해도 될까. 교회를 떠나도 될까. ‘주의 종에게 대적하지 마라’, ‘영적 공동체를 지키라’는 말은 교회의 오래된 신념이다. 차라리 나를 되돌리는 게 편했다. ‘너도 지금 판단하고 있잖아’, ‘하나님이 노하실 거야’라고 스스로 설득했지만 마음은 그대로였다. 운전을 하다가 책을 읽다가, 불쑥 목사가 나타나 머리를 흔들고 가슴을 휘저었다. 그런 나를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새 나의 일상까지 엉클어졌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화를 내고, 별 뜻 없는 말에 열을 올렸다. 예상치 못한 순간 왈칵 눈물을 쏟기도 했다. 내 마음이 남의 것 같았다.


  진한 사랑 끝에 오는 이별처럼, 우리는 앓았다. 나와 남편은 목사를 참 좋아했다. 결혼을 앞두고 목사를 만났을 때, ‘내 인생 가까이 이런 이가 생기다니’ 꽤 근사했다. ‘돕는 배필’이라는 주례사를 삶에 깊이 새겼다. 그는 필요한 순간 적절한 성경 구절을 막힘없이 내밀었다. 자유롭고 진취적인 자세, 지적이고 검소한 삶까지 흠잡을 것 없었다. 그때껏 내가 잘못 알고 있던 신앙의 조각들이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이 옳다 해도,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목사의 설교가 강의처럼 느껴진 것이.


   목사에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글을 쓰면서 제 부족함을 봐요. 저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강의도 하고 싶고요. 제 모자란 모습 그대로 다가가고, 저도 위로받으면 좋겠어요.” 짧은 공백 끝에 목사가 답했다. “누가 불러줘야 하겠죠.”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다. 나는 슬며시 웃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와 ‘맞는 말이야. 누가 불러줘야 하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은 ‘누가 불러주겠어?’, ‘네가 무슨 작가?’, ‘네가 무슨 강사?’라는 말로 번져 나갔다. 지극히 객관적인 말이 얼마나 주관적인 상처가 될 수 있는지, 마음은 알았다. 공모전에 당선되어 책을 내고서도 그 말은 살아 남았다. ‘누가 나를 불러줄까’ 시시때때로 나의 자격에 대해 반문했다.


  이별은 나의 한계이기도 했다. 목사에게서 ‘나’를 본다. 늘 읽는 ‘나’, 가볍게 살자며 김수현의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를 또 열심히 읽는 ‘나’ 말이다. 나는 종종 읽고 나서 그렇게 산 듯 떠들곤 했다. 읽고 쓰는 것에 치우쳐 다른 일에는 시큰둥한 ‘나’도 본다. 나는 늘 읽을 책이 너무 많아 허둥댔다. 딸아이가 “엄마는 나는 싫고 책만 좋은가 봐”라며 주위를 서성이면, “같이 놀자” 해놓고선 몰래 책을 폈다. 쉽게 판단하는 ‘나’도 본다. 남편은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에 데었다. 읽고 나서 내 마음은 몽글몽글해졌지만, 싸울 때면 ‘당신이 옳다’가 ‘자신이 옳다’의 논리로 바뀌었다. 남편의 가슴은 숭숭 뚫렸을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그런 ‘나’에게서 돌아서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모든 것에 답해야 하는 ‘나’를 버려야 했다. 목사와 나는 기울기가 같은 두 선이었다. 비슷해서 절대 만날 수 없는 평행선. 한쪽이 나가야 한다면내가 나가는 게 았다. 내가 누군가를 이토록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나를 이토록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모두를 이해하고, 모두에게 이해받아야 하는, 내 오랜 윤리에 대한 배반이었다. 청빈과 인색이 한 사람 안에 있음을 10년 만에 알았다. 하필 목사라니,  ‘벌 받지 않을까’,  ‘망하면 어쩌지’ 아이처럼 떨었다. 하지만 더 머무는 것은 정성스레 살아온 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연두가 초록이 되는 6월, 올해 초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우리집은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교회와 마주 보고 있다. 눈 앞에 교회를 두고 온라인 예배를 드렸다. 주일이면 교회 앞에 늘어선 차를 살피고,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3년째 이어진 예레미야 설교가 계속됐다. 23장 설교를 마지막으로 들었으니, 52장까지 3년은  걸릴 것이다. 벌하고, 보복하고, 불사르고, 파멸하는 하나님을 견딜 수 없었다. 내 아이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 그렇게 저주하며 돌아서진 않을 테지. 그러면서도  삶이 남유다 백성처럼 사라질까 불안했.


  그럴수록 나는 더 치열하게 묻고 기도했다. 고요한 새벽녘, 기도를 시작하면 가슴이 불덩이가 얹어졌다. 삼키고, 욕하고, 흐느꼈다. 어느 때부터였을까. 마음이 조금씩 갈 길을 찾아간 것이.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었다. 그것을 찾겠다고  길을 나섰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터널을 끝없이 걸었다. 저 멀리 반짝 빛이 보였다. 출구일까.  ‘괜찮아’,  ‘잘하고 있어’ 내 안에서 누군가 말했다. 한참을 돌아왔는데 그 빛은 내 안에 있었다. 누구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다. 얼어붙은 마음에도 봄은 오고야 만다.


매거진의 이전글 교회는 추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