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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09. 2024

착한, 나쁜 언니

동생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을 때 나는 웃음을 지었다

동생은 이제 막 돋아난 꽃봉오리 같았다. 눈망울은 컸고 살결은 하얬고 매무새는 여렸다. 예린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하는 성정이었으나 타고난 외모와 차분한 몸가짐으로 어딜 가나 반짝였다. 여섯 살의 청순미라니…. 동생을 보고 있으면 그 아이를 타고 흐르는 아름다움이 어떻게 피어날지 궁금했다. 예린이 수줍어할수록 예린과 친해지고 싶은 아이들이 많아졌다. 여자아이들은 예린을 시샘하면서도 가까워지려 했고, 남자아이들은 나중에 차를 사면 예린을 가장 먼저 태워주겠다는 둥 어른이 되면 예린과 결혼을 하겠다는 둥 너스레를 떨며 그 곁을 맴돌았다.


나는 아무에게도 눈길 받지 못하는 나뭇잎 같았다. 생김새는 오종종했고 살갗은 까맸고 행동은 덤벙댔다. 다만 《빨간머리 앤》의 앤처럼 천방지축 같은 면이 있어서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소녀로 자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서운 아버지와 무심한 엄마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나는 모범생이 되기로 했다. 결국 군데군데 벗겨진 도금 목걸이처럼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이 되었지만…. 나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몰랐고 나에게 그것을 알려준 어른은 없었다. 다만 학교에서 성공해야 한다고 배웠고 교회의 가르침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나는 돈과 학벌, 외모로 나를 무장해 잘난 인간, 즉 잘 팔리는 인간이 되기로 했다.


머릿속에 아파트를 세웠다.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고 점수를 매겨 서열화했다. 그 기준을 설명할 수 없지만 누군가를 몇 번 만나면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계산…. 내 아래 있는 이들을 동정하면서 내가 거기 있지 않음에 안심했고, 내 위에 있는 이를 부러워하면서 나도 거기 가기 위해 안달했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같은 말이었다. 나보다 위에 있는 이들을 우러러보며 열등감을, 나보다 아래에 이들을 내려보며 우월감을 느꼈다.


예린은 내 위였고 나는 어떻게든 예린을 이겨서 내 아래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나의 첫 번째 경쟁 상대로 삼기에 예린은 막강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한글을 깨치는 동안(결국 한글을 다 깨치지 못하고 1학년이 되었지만) 동생은 어깨너머로 혼자 한글을 익혔다. 예린은 시험을 보면 백 점이었고, 그림을 그리면 상을 받았다. 선거를 하면 반장이 되었고, 담임 선생님은 언제나 예린을 눈여겨보았다. 어느 날 동생이 나를 ‘시껌둥이’라고 놀렸을 때 나는 저주에 걸린 시녀처럼 참담하게 울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어른이 되고 나서, 내가 얼마나 예린을 이기고 싶어 했는지 깨달은 뒤에야 알았다. ‘나는 어떻게 해도 동생을 이길 수 없겠구나.’라는 체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린의 사춘기는 혹독했다. 예린의 미모와 재능은 주변 친구들의 시기로 얼룩져 따돌림으로 돌아왔다. 예린을 몰아낸 중학생무리는 무서울 만큼 끈끈했다. 예린은 무리에서 낙오되자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자신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투명한 얼굴에는 여드름이 돋아났고 가늘었던 몸에 살이 붙었다. 귀밑 2cm 몽실이 머리는 버섯처럼 덥수룩했고 2차 성징으로 인해 곱슬머리가 도드라졌다. 예린은 우등생이었던 자신의 지난 시절을 깨끗이 지웠는지 더 이상 책상 앞에 앉지 않았다. 텔레비전만이 그 시절 예린을 기억할 뿐이었다.


동생이 재수를 하고서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을 때 나는 비밀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예린의 추락은 안타까웠지만 그로써 예린이 내 아래에 놓였음이 입증되었다. 나는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면서, 예쁘다는 칭찬을 듣기 시작하면서, 빚 없이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이제 어떻게 해도 예린이 나를 올라설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역전승…. 예린이 나에게 짐이 되지 않을 만큼 자기 몫의 삶을 살되, 내 위로 올라가지 않기를 바랐다. 이 불경스러운 기도는 신에게도 드리지 못했으나 내가 내 마음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쓴다는 건 나의 약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살아야 했기에 얼려놓았던 감정이 있다. 그것을 녹여서, 우월감, 열등감, 체념, 슬픔 같은 이름을 붙여준다. 과거가 글이 되어 내 밖으로 나오면 나는 조금씩 ‘나’에게서 놓여난다. 내 안에 꽁꽁 묶여, 내 시선에 꽉꽉 갇혀 보이지 않았던 당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프다. 해석되지 않았던 사건의 이유를 헤아리며 비로소 당신의 마음이 되어본다. 약함을 보듬어 행복하게 끝나면 좋으련만, 느닷없이 나타난 나의 악함이 엔딩 장면이라니…. 피해자의 호소문을 쓰다가 갑자기 가해자의 사과문을 써야 하는 시점이다. 순간 쓰기를 멈추고 싶지만 세드엔딩임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다. 나쁜 ‘나들’은 언제부터 내 안에 살았을까. 나쁜 ‘나들’을 추적하다가 결국 약해서 악해진 ‘나들’을 만난다. 실컷 울고 부둥켜안으며 ‘나들’의 장례를 치른다.


세상을 이기고 지는 싸움으로 여기며 살아온 내가 슬프다. 먼저 사랑하면 꼭 지는 것 같았다. 사랑하다가 어긋나면 어린아이처럼 토라져 미워했다. 내가 미워하는 것들은 실은 사랑했던 것들이다. 사랑하는 것은 이기고 싶었다. 이겨야 사랑받을 줄 알았다. 나는 그렇게 서툰 사랑의 쳇바퀴를 구르고 또 굴렀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겨우 쳇바퀴를 빠져나오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언제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진심으로 노래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 오늘도 쓴다. 곱게 써서 사뿐히 보낸다. 깃털 하나의 무게만큼 가벼워진다.


Photo by Daiga Ellab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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