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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Nov 27. 2024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내야’하고

<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열한 번째 해방

<나의 해방일지> Episode 6

나의 해방일지 2권 100p


45. 구씨네(밤)


창희가 준 잔에 소주를 따르고, 천천히 마시는 구씨.

눈두덩이 벌겋다. 취기에 좀 풀어진 느낌.


구씨  괜찮을 땐 괜찮은데, 싫을 땐… 눈앞에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말을 하면 더 싫어(말끝에 피식). 쓸데없는 말인데 들어야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내야’하고


미정  !


구씨  뭐라고 말해야 되니. 생각해 내는 일 자체가… 중노동이야.


미정  ...(피식) 나도 그런데.


구씨  …(설마)


미정  하루 24시간 중 괜찮은 시간은 한… 한두 시간 되나. 좋은 시간도 아니고 그냥 괜찮은 시간이 그 정도. 나머진 다, 견디는 시간




어느샌가부터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산골짜기 시골 동네에서 집 한 채 지어놓고 살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아니면 가끔 출근길에 절대 일어나지 못할 망상과 같은 바람을 가지고 회사로 향할 때가 있다. ‘하루만이라도 좋으니까 단 한마디도 안 할 수 있는 날이 있으면 얼마나 좋게.’ 그 누구도 나를 찾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는 전화기가 꺼진 듯 조용한 날이 있길. 극내향형이어서 그런지, 하루 동안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말과 시간의 총량이 극히도 적었다. 그 총량을 다 채우고 나면, 그때부터는 나 혼자 ‘사회적 거리두기’ 모드에 들어간다. 에어팟 노이즈캔슬링 모드를 킨 채 노래 볼륨을 가능한 크게 틀어서 외부 소리가 들려오지 않게. 가야 할 목적지만 시선을 고정한 채 목적지 이외의 것은 자체 아웃포커싱을 해버린다. (난시에 원시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 사회적 거리두기 모드가 작동되지 못하면, 나도 모르게 ‘인간 혐오 모드’에 빠지게 된다. 아무도 내게 피해를 주지 않을지라도, 사람이 북적북적한 버스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퇴근하고 나서 누군가 데시벨이 높은 말을 쏟아내면, 그 말이 폭력처럼 느껴질 만큼 어질어질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내게 구씨의 말은 너무나도 공감이 갔다. 아니, 공감을 넘어서 마치 내 일기장을 누가 훔쳐본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싫을 땐… 눈앞에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말을 하면 더 싫어.
쓸데없는 말인데 들어야 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내야’하고.

구씨의 말처럼, 싫을 땐 사람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말소리가 들리는 것도 싫었고, 내가 말소리를 내야 하는 것도 싫었다.  시야에 걸리는 누군가가 내가 아는 사람이어서, 그 사람이 말을 하면 더 싫었다. 특별히 약속을 잡지 않고 마주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에는 보통, 그리고 유독 알맹이가 없으니까. 억지로 말을 만들어내야 했고,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소식이 오가야만 했으니까.  유독 스몰토크에 약한 나여서 그런지, 빈껍데기의 핑퐁 속 자연스러움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가끔은 스스로 자문하게 됐다. ‘혹시, 나 사회성에 문제 있나.’ 그렇게 사람에 대한 내 시선에 대해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밀던 때, 드라마에서 구 씨의 독백을, 그리고 미정이의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둘의 대사가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래. 그리고 우리도 그래.’


  어린아이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 놀이터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하는 역할 놀이보다는 모래로 두꺼비집을 만드는 게 더 좋았다. 친구랑 나란히 그네를 타며 누가 더 멀리 가나 시합을 하는 것보다 혼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영차영차 발을 굴려 내 앞에 보이는 시야가 바뀌는 걸 구경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를 살아 숨 쉬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조차도 글쓰기, 독서. 조용한 곳에 앉아 혼자 고즈넉하게 즐기는 활동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사회는 공동체를 강조했다. 공동체 활동도 인간의 삶에 중요한 일부분이긴 하지만, 유독 ‘무리’라는 개념이 강했다. 학창 시절, 급식실에서 혼자 밥을 먹는 아이들을 보며 주변에서는 숙덕숙덕거렸다. 현장체험학습을 가도 항상 무리를 지어, 혹은 짝수로 다니곤 했다. 특별활동실을 갈 때도 꼭 누군가와 ‘함께’. 홀수인 무리에서 둘둘 짝지어하는 활동이 있을 때 계속해서 혼자 하는 아이가 있으면 무리에서 겉도는 애 취급을 하기도 했다. 마치 ‘혼자’라는 건 ‘잘못되어 있는 상태‘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이 사람의 성향이 외향적인지 내향적인지, 어울려 노는 걸 좋아하는지 개인적인 활동을 좋아하는지, 사람의 성향에 대한 판단을 떠나 사람 자체에 낙인이 찍히는 듯했다.


대부분이 그렇듯, 어렸을 때는 유독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민간 했다. 혼자가 되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여길까 봐 주변에서 하는 것처럼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녔다. 인기가 많은 사람인처럼,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 사람인처럼,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냈다. 사람들이 사이에 있기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즐거운 일도, 재미있는 일도 가득했다. 하지만, 북적북적한 무리에서 지내는 건 언제나 소모되는 시간이었다. 내 에너지와 나라는 사람이 깎여가는 시간. 의미 없는 안부와 진심 없는 말들이 오기는 곳에서 쉴 곳은 없었다.


그러다 코로나팬데믹을 맞이하고, 원래 내 삶에 터전에서 벗어나 타지로 직장을 잡았을 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혼자 밥도 먹고, 혼자 영화도 보고, 혼자 쇼핑도 가고. 혼자인 걸 이상하게 여기던 학창 시절과 달리, 사회에서는 타인이 혼자인 것에 대해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집단과 사회의 차이어서 그럴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깨달았다. ‘아, 나는 혼자일 때 가장 편안한 상태에 놓이는구나.’ 물론 혼자이기에 문득문득 외로움도 찾아오고 우울함도 찾아왔지만, 그마저 잠시 들여보냈다가 다독여 돌려보낼 정도로 혼자 있을 때의 안정감이 좋았다. 가장 나다울 수 있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것도 꾸며내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상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니, 내 안에 있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 스스로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을 살피지 않아도 되니, 스스로를 살펴줄 수 있었다. 나에게 묻는 안부는 오가는 타인에게 하는 것처럼 진심 없는 껍데기가 아니었다. 스스로와 나누는 대화는 타인에게 하는 것처럼 늘어져가는 공백을 채우기 위한 의미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가장 나다운 시간이었으며, 나와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나의 말의 진심이 가장 짙은 시간이었으며, 나의 말의 농도가 가장 진한 시간이었다.


<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열한 번째 해방, 혼자 있는 시간으로의 해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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