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열두 번째 해방
나의 해방일지 2권 138p
자기 생각에 빠져들 듯이 한곳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하는 상민.
상민 내가 숨 쉬는 것 다음으로 많이 하는 게, 시계 보는 거더라고. 툭하면 시곌 봐. 계속. ‘벌써 이렇게 됐나? 벌써?’ 그러면서 종일 봐. 하루 24시간, 출근하고 퇴근하고, 먹고 자고, 똑같은데, 시계는 왜 계속 볼까?(이유를 생각해 보니) 뭔가, 하루를 알차게 살아 내야 한다는 강박은 있는데, 제대로 한 건 없고… 계속 시계만 보면서 계속 쫓기는 거야. (잠잠) 내가 평생 그랬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희한하게 바로 심장이 따.따.따. 가더라고. 그전엔 심장도 따따따따따따… 이걸 알아채는 데 50년이 걸렸다는 게 참…(차분이 깊게 숨을 내쉬고)
태훈과 미정은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듣는데,
향기는 한마디 거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중해 듣다가
향기 저도 좀 그런 편인데. 다들 어느 정도 그런 강박은 있지 않나요? 그리고 부장님이 그렇게 시간을 일분일초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알뜰하게 쓰셨으니까, 지금 사내 핵심 인력으로 계신 게 아닐까 싶어요. (생글생글)
상민 … ‘조언하지 않는다. 위로하지 않는다. ’ 저희 클럽의 규칙입니다.
향기 아, 네.(살짝 민망)
상민 (마무리) 시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순 없겠지만, 할 만큼 했으면 쉬고, 잘 만큼 잤으면 일어나고, 그렇게 내 템포를 갖는 게 나한테 가장 필요한 해방 아닐까… 그래서 ‘내 템포대로…’라고 정했습니다.
뭔가, 하루를 알차게 살아내야 한다는 강박은 있는데, 제대로 한 건 없고…
계속 시계만 보면서 계속 쫓기는 거야.
이번엔 어떤 대사를 가지고 글을 쓸까, 대본집을 뒤적이다가 눈길을 사로잡은 대사였다. 하루를 알차게 살아내야 한다는 강박은 있는데, 제대로 한 건 없고… 계속 시계만 보면서 계속 쫓기는 거야. 업무가 극성수기인 시기라, 업무 하나를 해결하면 새로운 두 개가 생기는 요즘이었다. 거기에다가 개인적으로 크고 작은 일들도 넘쳐서 회사 업무일지든, 개인적인 다이어리든 ‘투두리스트’가 넘쳐나는 요즘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모닝 페이지를 적고 자세교정 스트레칭을 하고 나면 출근 시간이 임박한다. 시간에 쫓기면서 출근 준비를 하고 집에 나서면 언제나 버스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다. 걷는 듯 뛰는 듯 경보와 달리기 그 사이의 걸음걸이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출근을 해서 사내 메신저를 켜면 쏟아지는 업무 연락들. 연락들을 확인하며 하루 일정을 정리하면 빼곡하게 늘어진 타임라인을 마주한다. 중요한 업무, 긴급한 업무, 또 ‘긴급’을 달고 날아오는 새로운 업무들. ‘이거 오늘 안에 끝내야 하는데…’ 마음은 급하지만 이런저런 복병으로 진도가 생각만큼 나오지 않는다. ‘빨리, 조금만 더 빨리’ 시간에 쫓기듯 업무 하다 시계를 보면 어느새 저녁 8시가 훌쩍 지나있다. 그럼 또 조급한 마음이 차올랐다. 빨리 집 가서 글도 쓰고, 하루 정리 시간도 가져야 하는데. 서둘러 집으로 퇴근하면 벌써 저녁 9시가 되어있다. 씻고 밀린 집안일을 하면 벌써 밤 10시다. 차분히 앉아 독서도 하고 싶고, 글도 쓰고 싶고, 묵상도 하고, 하루를 정리하는 다이어리도 적어야 하는데.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자려고 하는 내게는 시간이 턱 없이도 부족하다. 이거 다음에 이거, 이거 다음엔 이거… 할 일이 끝없이 늘어진 하루에 서둘러 서둘러 다음 초침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요즘이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보내고 난 하루를 가만히 돌아보면, 무엇을 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허겁지겁 밥을 먹으면 음식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듯, 하루를 허겁지겁 살아내다 보니 흘러가는 시간을 차분히 음미할 겨를이 없었다. ‘계속 쫓기는 거야.’ 저 대사가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았다. 왜 나는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왜 그리 서둘렀을까. 멍하니 바라본 벽에는 간접등이 만들어낸 얕은 그림자 사이로 캔들 심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살랑살랑가리는 심지를 바라보고 있는데, 마음이 차분해졌다. 하루종일 서두르느라 반쯤 붕 떠 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깊이였다.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는 마음의 깊이. 그렇게 차분해진 마음 위로 생각들이 하나둘 소복이 쌓여갔다.
돌이켜보면, 나는 원래 느린 사람이었다. 혼자 천천히 밥을 먹을 땐 한 시간을 가득 채워 오물오물 씹어 먹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 간접등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그리고 넋 놓고 하늘 위에 떠다니는 구름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시간이 많았던 대학교 때는 잔디 위에 벌러덩 누워 하늘 구경하는 게 소소한 행복일 정도로. 템포가 빠른 아이돌 노래보다는 잔잔하고 느릿한 재즈나 뉴에이지 음악을 좋아했다. 공부를 했든 안 했든 초, 중, 고, 그리고 대학교까지 금메달을 목에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인문대여서 가능했겠지만) 시험공부를 하지 않아 모르는 문제가 나올지언정, 그 문제가 요하는 이론을 모를지언정 진지하게 고민하며 서술형 답안지를 주욱 채워 제출했다. 오죽하면 남들은 20-30분 만에 치고 나오는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45분 보고 나올 정도로.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으면 한참을 그 문장에 시선을 두고 있기도 하고. 정적이고 차분한 걸 좋아하고, 빠르게 훑고 지나가기보다는 깊이 파고드는 걸 좋아하는 탓에 언제나 ‘효율’이나 ‘속도감’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요즘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보였다. ‘여유’. 여유로운 시간을 잃어버렸고, 여유로운 태도를 잃어버렸고, 여유로운 생각을 잃어버렸다.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스스로 정한 성과지표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만큼’만을 생각하고 마구잡이로 집어넣은 할 일들에 내게 가장 편안한 템포를, 여유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효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빠른 시간에 많은 것을 하려고 했다. 많은 것을 한다고 해서 막상 효율적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는데 말이다. 여유롭다고 느끼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분, 십분. 일정표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할 일 하나만 내려놓아도 어제와는 다른 별들이 수놓고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평안해질 수 있었다. 째깍이는 초침을 내려놓으면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차분해진 마음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크고 작은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는 시간들 곳곳에 여유를 위한 틈을 내어주어야겠다. 게으름을 피우느라 불편한 마음을 가진채 이리저리 미루며 하는 의미 없는 포털사이트 서핑, 유튜브, 인스타그램에 허비하는 시간을 정리해도 여유를 위한 틈은 충분했다.
‘많이, 빨리, 잘’이라는 단어들은 내려놓고 그 자리에 ‘나만의’라는 단어를 새겨두겠다고 다짐한다. <나의 해방일지> 속 찾은 열두 번째 해방, 나만의 템포로의 해방이었다.
오늘은, 좋아하는 시 한 편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회전목마 타는 아이들을
바라본 적 있는가.
아니면 땅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귀 기울인 적 있는가.
펄럭이며 날아가는 나비를 뒤따라간 적은,
저물어 가는 태양빛을 지켜본 적은.
속도를 늦추라.
너무 빨리 춤추지 말라.
시간은 짧고
음악은 머지않아 끝날 테니.
하루하루를 바쁘게 뛰어다니는가.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서도
대답조차 듣지 못할 만큼.
하루가 끝나 잠자리에 누워서도
앞으로 할 백 가지 일들이
머릿속을 달려가는가.
속도를 늦추라.
너무 빨리 춤추지 말라.
시간은 짧고,
음악은 머지않아 끝날 테니.
아이에게 말한 적 있는가,
내일로 미루자고.
그토록 바쁜 움직임 속에
아이의 슬픈 얼굴은 보지 못했는가.
어딘가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서둘러 달려갈 때
그곳으로 가는 즐거움의 절반은 놓치는 것이다.
걱정과 조바심으로 보낸 하루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버려지는 선물과 같다.
삶은 달리기 경주가 아니다.
속도를 늦추고,
음악에 귀 기울이라.
노래가 끝나기 전에
- 데이비드 L. 웨더포드
아동심리학자이며 작가인 웨더포드가 신장병 치료를 받던 중 신장 이식 수술에 실패하고, 순간순간의 소중함을 느껴서 쓴 시(마음 챙김의 시, 류시화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