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브런치 등 글을 쓸 때는 '윤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블로그에 '글을 써보자'라고 다짐을 했을 때 블로그 별명을 지어야 했다. 어떤 게 좋을까, 고민하다고 생각해 낸 게 '윤슬'이었다. 성이 윤 씨인지라, '윤 OO의 슬기로운 생활'에서 앞글자만 따와 '윤슬'이라고 정했다. 어느 날 블로그 독자분이 '윤슬'이라는 뜻과 잘 어울리는 글들이라고 댓글을 남겨주셨다. 윤슬? 사전에 검색해 보니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다. 이렇게 멋진 뜻이 있는 단어였다니. 바다에 일렁이는 반짝이는 잔물결을 좋아했던지라, 더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이거다!' 내가 쓰고 싶은 글들의 톤과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윤슬'이라는 단어에 애착이 갔다.
이러한 이야기를 남자친구에게 흘리듯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 듯하다. 나조차도 말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야기였는데, 남자친구는 기억을 하고 있었나 보다. 저번 주 토요일은 남자친구와 만난 지 400일이 되는 날이었는데, 이 날을 기념하여 남자친구가 윤슬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화 그리기 키트를 두 개 준비해 왔다. 400일로부터 딱 1년 전, 드로잉 카페에 갔던 게 생각나서 유화 그리기 키트를 준비하고 싶었는데, 그 그림으로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윤슬'을 고르고 싶었단다. 고맙게도 낮 시간 대의 윤슬과 노을 진 시간 대의 윤슬, 둘 중에 무엇을 더 좋아할지 몰라서 두 가지를 다 준비해 왔다. 그중, 노을이 진 윤슬이 좀 더 마음에 들어서 그걸 먼저 해보기로 했다.
유화 그리기 키트는 도안이 그려져 있는 캔버스와 물감, 붓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안 위에는 칠해야 하는 물감 번호가 적혀있고, 그 번호에 따라 해당하는 물감을 칠해나가면 되는 거였다. 번호에 맞춰 캔버스에 물감을 하나둘 칠해갔다. 바다 위에 비치는 물결을 표현하는 거라, 칠해야 하는 번호가 커다란 캔버스 안에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생각보다 높은 난도에 서로 당황하며 캔버스 위에 물감을 칠하는 데 집중했다.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 그 이상이었다. 캔버스에 물감 칠하기에 몰입하는 그 순간은 모든 게 잊혔다. 현실에서의 고민거리, 해결해야 할 숙제들.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채, 오로지 '칠하기'에만 몰두하는 시간이었다. 해방된 느낌이었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것에만 몰두한 채, 그 외의 모든 것들에서는 해방된 느낌.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 고민거리들이 마음 한구석에 박혀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화 물감을 칠하고 있는 동안은 잠시 현실 밖을 벗어나 다른 세상에 있는 느낌이었다. 칠하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을 하니,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시끄럽던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그어진 선을 따라 물감을 캔버스에 입히는 것, 그 행위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마음이 가는 대로, 잘 칠할 필요도 없었고 효율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하얀 캔버스를 하나둘 채워가는 것. 차분하고, 평화로웠다. 그 순간만큼은 도피가 아닌 해방이었다.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은 줄곤 해왔지만, 이만큼 행복할 줄은 몰랐다. 유화 그리기 키트는 전부터 줄곧 해보고 싶었던 건데, 왜 그동안 하지 못했을까. 일상을 돌이켜보니 목표와 관련된 일들, 아니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글쓰기, 독서, 운동 아니면 설거지나 청소, 가계부 쓰기처럼 현실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꿈만 꾸고 있기에 나는 욕심이 많았다. 내 삶에 '유용'한 것들만을 일상에 채워 넣기 급급했다. 그것들을 채워넣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성장과 목표, 꿈이라는 저 멀리 빛나고 있는 대상 앞에서 여유라는 눈앞의 소박한 대상은 언제나 빛을 잃었다.
생각해 보면, 요리나 댄스 경연 프로그램을 보는 걸 좋아했고 일주일에 한 편은 꼭 영화를 챙겨봤다. 프랑스 자수, 컬러링북, 목공예 등 손으로 무언갈 만드는 걸 좋아했다. 한 달에 한 번은 그 달에 찍었던 사진들을 인화해 나만의 한 달 앨범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내 목표나 성장과 맞닿아 있지는 않았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용한 행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유용'의 담장을 넘지 못한 채 하나둘, 쌓여만 있었다. 이런 것들을 삶에 아예 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이런 무용한 것들을 계획하고 들이지 않았다. 그날 해야 할 '유용'한 것을 하기 싫어 도망간 '회피'였다.
유용과 무용,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용'으로 분류되었던 유화 그리기는 뜻밖에도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현실에서 잠깐 벗어나 아예 다른 세상에 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어느샌가 마음에는 에너지가 그리고 여유가 차올라 있었다. 유용한 것들만을 좇다 놓치고 있었다. 무용한 것들은 실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공백'이었다는 걸.
유용한 것들만을 좇다가는 자칫 삶이 팍팍해질 수 있었다. 빡빡하게 들어찬 유용한 것들 사이사이 무용한 것들로 공백을 만들어주어야 했다. 어느 작품에서나 강약 조절이 필요하듯, 우리 삶에서도 강약 조절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용한 것들은 그 강약을 조절해 주는 적당한 공백이었다.
유용의 담장 너머에 있던 무용들을, 조금은 더 기꺼이 삶에 맞이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