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감', 주어진 업무를 잘 수행하려는 마음가짐
엊그제 남자친구와 약간의 언쟁이 있었다. 저번 주 주말에 발생한 지역의 사회 재난을 대처하는 '공무원들의 사명감'이 불씨였다. 재난 담당 부서는 아니지만, 이 사회 재난의 원인이 우리 부서에서 담당하는 업무였다. 그래서 주말 내내 출근하고, 주중에도 야근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이 재난을 대하는 시민들의 입장과 공무원의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남자친구가 말했다. 공무원들이 사명감이 부족한 것 같다고.
이 말을 듣는데 마음 속에 부풀어있었던 속상함이 펑, 터져버렸다. 비상근무령 때문에 가족과 혹은 친구들과 여행을 가다가 다시 방향을 틀어 근무처로 돌아온 직원들이 있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비상근무 시간을 초과해서 근무를 했던 직원들도 수두룩했다. 우리 팀만 해도, 팀장님과 옆 선배는 토요일 저녁 여섯 시에 출근해서 다음 날 저녁 일곱 시에 퇴근을 했다. 다들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쥐어 짜내고, 몸으로 동분서주하며 본인들의 몸을 갈아 넣고 있었다.
그런데 사명감이라니. 이 부분에 대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공무원 입장에서 화를 냈다. 우리라고 손을 놓고 있는 게 아니라고. 남자친구는 이런 부분의 문제에 대해서는 단어 선택을 더 신중히 하겠다며 사과를 했다. 다툼은 가라앉았지만, 머릿속에 들어박힌 '사명감'이라는 단어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명감이 무엇일까. '주어진 업무를 잘 수행하려는 마음가짐'이라고 국어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알사탕을 입에 넣고 굴리듯, 사명감이라는 단어를 찬찬히 굴려보았다. 남자친구에게는 우리가 지금 사명 감 없이 일하고 있는 것 같냐며 화를 냈지만, 진짜 나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었을까. 공무원으로서 갖는 사명감은 무엇일까.
작년에 맡았던 공유공간 사업이 생각났다. 국장님으로부터 지령이 떨어져 부랴부랴 맡았던 업무였다. '공공시설 유휴공간을 24시간 개방하기' 이게 가능한 일인가. 사례를 뒤져봐도 24시간 개방을 하는 공공시설은 없었다. '전국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은 사업이었다. 사업을 착수하고 나서 큰 틀을 짰다. 경찰서와 협업, 다양한 무인매장 범죄 사례 검토, 이에 따른 방안 도출. 사용자를 특정하자, 해서 '입주형 스터디 카페'를 기획했다. 설계부터 인테리어 공사, 전기공사, 통신공사 각종 공사를 통해 공간이 조성되었다.
이 업무가 크게 기억에 남는 건,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이 아닌 공공서비스를 제공받는 입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했기 때문이다. 스터디카페를 자주 이용했던 사람으로서, 스터디카페를 이용했을 때 어떤 점이 불편했는지, 그리고 어떤 스터디카페를 이용했을 때 만족스러웠는지 디테일을 잡아갔다.
의자에 긴 외투를 걸어놨을 때, 외투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스터디카페의 정사각형 작은 사물함이 아닌, 각자 공간에 옷걸이가 달린 사물함을 넣어줬다. 옷걸이를 살 때도, 어떤 옷걸이가 마음에 들었더라. 얇은 외투를 아무 옷걸이에나 걸어놓으면 생기는 '어깨 뿔'이 싫었다. 그러면 어깨 뿔이 방지되는 라운드형 옷걸이. 딱딱한 밑창의 신발을 신었을 때 생기는 '딱딱'거리는 소음이 자뭇 신경 쓰였다. 그래서 편히 다닐 수 있게, 그리고 신발 소음을 줄일 수 있게 푹신한 실내 슬리퍼를 각 좌석마다 준비했다.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었는데, 의자는 쿠션 부분이 어두운 색을 선택했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호르몬 이슈로 인해 의자 쿠션이 더럽혀질까 신경 쓰일 수도 있으니까.
이런 디테일을 잡아가는 건 훨씬 품이 많이 들었다. 주변에서는 그렇게까지 신경 쓰기에는 지금 맡고 있는 업무가 너무 많지 않냐고 걱정했다. 물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느라 야근 시간이 늘어난 건 맞았다. 하지만, 이왕 공간을 조성할 거면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철저히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공간을 구성했다.
이 때는, 정말 고생스러웠지만 이때만큼 신명 나게 일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떤 공간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시간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 소중한 시간을 위해 공간에 정성을 들였다. 결과는 개소하기도 전에 입소문이 나서 예약자가 수두룩하게 생겼다. (행정적인 문제로 아직 개소하진 못했지만)
이런 게 사명감이 아니었을까. '이미 목 끝까지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여기에 사명감을 더해서 일해?'라고 남자친구에게 화를 냈지만, 실은 일을 즐겁게 하는 방법은 사명감을 갖고 일을 하는 것이었다. 사명감이라고 해서 거창한 게 아니었다. 무조건 희생적 정신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키는 일을 시키는 대로 꾸역꾸역 해내는 것이 아닌, 어떻게 하면 이 업무가 잘 처리될 수 있을까, 진심으로 고민하는 것. 일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고, 어차피 근무해야 하는 시간이라면 나의 일에 좀 더 진심을 담아보기로 한다. 주어진 과업에서 최선의 결과를 궁리하고 그 목표를 위해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는 것. 일이 재미있어지는 마법 같은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