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 시 오분. 청사를 나오니 벌써 하늘이 시꺼메져있었다. 컴퓨터와 모니터들이 내뿜는 열기들로 인해 후끈했던 사무실과 달리, 청사 밖의 기온은 제법 쌀쌀했다.
초록색을 띄고 있는 핸드폰 배터리와는 달리, 체력은 이미 빨간색 배터리 부족이었다.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터덜터덜 올라탄 버스에 승객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고요한 버스 안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취업 사기를 당한 건가...'
워라밸을 즐기기 위해 선택한 공무원의 삶은, 비수기라는 말이 낯설 만큼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일복이 많은 건지, 어째 가는 부서마다 일이 많기로 악명이 높은 곳들이었다. 대신 근평이나 성과급이 짭짤했지만, 유일의 목표였던 워라밸과 맞바꾼 승진이나 성과급인지라 별다른 흥이 나진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긴 하지만, '취업 사기'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의 업무 강도였다.
요새는 그 강도가 절정에 달했다. 일주일동안 해야 하는 할 일 리스트를 주욱 적어놓았더니 에이포 한 페이지가 가득 찼다. 부지런히 하나둘씩 실선을 그어도 여전히 산더미처럼 남아있었다. 5월 말에서 6월 초. 상반기 사업을 진행하며 하반기 사업을 준비하는 시기여서 지나가는 개도 안 건든다는 시기였다. 여기에 올해 처음으로 시행하는 사업 수행 단체 선정이 얹어지고, 최근에 발생한 사회 재난 대응 업무가 하나 더 얹어졌다.
이걸 다 할 수나 있을까. 이게 끝나기는 할까. 고요히 달리는 버스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데 문득, 정말 문득, 공무원 생활 초반에 전 부서 팀장님이 해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절대 안 끝날 것 같이 힘든 시간도, 결국 끝이 있더라.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언젠간 끝이 나있어.'
2022년 1월. 공무원으로 입직하던 해, 악명 높았던 코로나 선거가 두 번이나 있었다. 3월에 대선, 그리고 6월에 지선. 그때 발령받았던 동은 인구가 7만이었다. 동 단위 인구로는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동이었고, 웬만한 군 단위 인구와 맞먹는 규모의 큰 동이었다. 그리고 내가 발령받은 팀은 선거를 담당하는 팀이었다. 인구가 7만 인 곳에서 선거를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는데, 마침 그때가 코로나 시국이었다.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선거 업무에서 정과 부를 맡고 있던 직원 두 명이 나란히 코로나에 걸려 격리에 들어갔다. 남은 팀원이라고는 입직한 지 고작 두 달 차였던 나와 그 동 행정복지센터에 발령받은 지 두 달 차였던 선배 한 명, 그리고 팀장님이 고작이었다.
매일을 열한 시가 넘어 퇴근했다. 간발의 차로 막차를 놓치면 팀장님이나 다른 선배가 집까지 데려다 주기 일쑤였다. 체력의 한계에 부딪혀 잔뜩 기진맥진해 있는 선배와 나에게 팀장님이 해주셨던 말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깊게 와닿지는 않았다. 인상 깊은 말이긴 했지만, 와닿지는 않았던 말이었다.
결국은 그 악명 높았던 코로나 선거를, 인구수가 많기로 악명 높았던 동에서 두 번이나 치러내고서야 팀장님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 시간의 한복판에 있을 땐,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며칠이나 남았지, 아직 많이 남았잖아.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거지.' 시간 속에서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저항력이 생겨 더 힘들 뿐이었다. 투두리스트에서 겨우 하나를 지워도 빼곡하게 남은 것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걸 언제 다 하지.
시간은 부지런히 도, 그리고 정직하게도 흘러 결국엔 끝이 난다. 내가 한발 가든 가지 않든, 투두리스트의 한 줄을 지우든 지우지 않든, 시간은 우리를 등에 태우고 결승점을 통과한다.
해치워야 할 수많은 일들에서 눈을 돌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들만 바라봐야겠다. 오늘 하루에 할 일, 그리고 지금 당장 할 일만 차근차근 해치워 나간다면 어느샌가 끝이 나있을 테니까. 남은 일들, 남은 시간들을 바라보면 언제 이걸 다 하지 암담할지라도 그저 시간에 몸을 맡긴 채, 그 순간 그 자리에 집중하다 보면 결국엔 끝이 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