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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나만의 속도로(2)

by 윤슬

5.

세 번째 부서 발령이 났다. 빈자리는 두 곳. 민원대 한 자리와 뒤에서 행정업무 보는 한 자리였다. 발령지에서 알고 지내던 직원에게 연락이 왔다. 두 자리 중 어떤 업무를 보고 싶냐고. 두 자리 모두 상관없다고, 배치해 주시는 대로 일하겠다고 말했다. 겸양 떠는 말도, 내 업무에 무책임 한 말도 아니었다. 첫 번째 부서였던 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육 개월 정도 뒷자리 행정업무도 봐봤고, 일 년 정도 민원대 업무도 봤다. 그곳은 행정업무도, 민원대 업무도 주변에서 가장 업무량이 많은 곳이었다. 온갖 민원 케이스들을 겪어봤기 때문에 어디서 민원 업무를 보든 거기만큼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두 번째 부서였던 사업부서에서도 행정업무에 필요한 경험은 거의 해보았다.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스스로 지침을 만들어 추진해보기도 했고, 법정 업무를 중앙부처 지침에 맞게 추진해보기도 했다. 내 연차에 비해 다양항 보고서를 작성하고 회계 처리를 해봤기 때문에 크게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어떤 업무를 맡든,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6.

새 부서인 동 행정복지센터에서는 민원대 업무를 맡게 되었다. 나와 같이 일했던 직원들과 팀장님은 업무 분장에 다소 의아함을 표했다. 같이 발령받은 직원은 민원 부서였고, 나는 사업 부서였기 때문에 당연히 뒷자리 행정 업무를 맡을 줄 아셨나 보다. 보통은 민원대는 저연차 직원들이 맡고, 뒷자리 행정업무는 민원대 업무를 보다 연차가 쌓이면 가는 자리 기이 때문인 듯도 했다.


아무렴 좋았다. 민원대는 업무나 시간 활용면에서는 자율도가 떨어지는 자리이긴 했지만, 칼퇴는 보장되는 자리였기 때문에. 퇴근을 하고도 머릿속에 너저분하게 흩어져있는 업무 생각에 퇴근한 것 같지 않았던 사업부서에서 지독하게 고생한지라, 퇴근하면 업무에서도 확실하게 퇴근할 수 있는 민원대가 반갑기도 했다.


7.

새 부서로 출근한 지 이틀이 지났을 때 깨달았다. 여기서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업무가 아니었다. 새 발령지 사람들의 기대였다. 일단 내가 거쳐간 부서들이 주는 기대감이 컸다. 민원 업무든, 행정 업무든 거기서 일했던 직원이니까 얼마나 잘하겠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숱하게 들었다. 부서장과 팀장님이 골라서 데려온 직원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알게 모르게 쌓인 구청 내에 호평과 전부서 사람들의 끝없는 칭찬은 사람들의 기대를 더욱 높여버렸다.


새 부서의 회식 날, 어쩌다 팀장님과 동장님 사이에 앉게 되었다. 알코올이 주는 흥과 함께 편안한 분위기로 업무 이야기를 했는데, 업무분장이 민원대가 되었던 경위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 네가 행정 업무가 부족해서 민원대에 배치된 게 아니라고. 이미 잘한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고. 지금 민원대에 체계가 없는데, 그 체계를 네가 잡아주면 좋겠다고. 그렇게 ‘민원 실장’ 역할을 하면서 슬슬 뒷자리로 넘어올 준비를 하라는 말이었다.


무슨 업무를 맡든, 피해가 되진 않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보내는 기대감은 피해가 되지 않을, 일 인분만큼의 아웃풋이 아니었다. 일 인분 이상의 것이었다. 이들의 기대가 무거웠다. 그리고 이미 전 부서에서 꽤나 강도 높게 업무를 해왔기에 열정과 에너지도 많이 식은 시기였다. 이들의 기대와 내가 해낼 수 있는 역량, 그리고 노력할 수 있는 에너지 사이의 균형을 보았을 때 기대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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