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가운데 나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그러니 굳이 지키지 않더라도 어디로 가겠는가?"
1.
어젯밤, 잠에 드렸는데 문득 정약용의 '수오재기(守吾齋記)'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천하 만물 가운데 지킬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내 밭을 지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정원의 여러 가지 꽃나무와 과일들을 뽑아갈 자가 있는가? 그 뿌리는 땅속 깊이 박혔다.
내 책을 훔쳐 없앨 자가 있는가? 성현의 경전이 세상에 퍼져 물이나 불처럼 흔한데 누가 능히 없앨 수 있겠는가?
내 옷이나 양식을 훔쳐 나를 궁색하게 하겠는가? 천하에 있는 실이 모두 내가 입을 옷이며, 천하에 모든 옷과 곡식을 없앨 수 있으랴.
그러니 천하 만물은 모두 지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오직 ‘나’라는 것만은 잘 달아나서, 드나드는 데 일정한 법칙이 없다.
守(수): 지킬 수
吾(오): 나 오
齋(재): 집 재, 방 책상방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능시험공부를 하며 봤던 구절이었다.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었나 보다. 불쑥, '수오재'라는 의미가 머릿속에 퍼졌다.
2.
새 부서에서의 적응(그리고 전입시험이라는 새로운 이슈), 운동과 독서 및 글쓰기, 집안일 등. 해야 하는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서 막막해하던 밤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시간을 써야 하는 일들은 쌓여있었다. 무언가 정신없이 바쁘지만 해야 하는 걸 처리하는데 급급했다. 하루를 채우고 있는 것들은 내가 판단하고 선택한 것들이었지만, 주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왜일까. 잠자리에 누웠지만 고민에 고민이 꼬리를 물던, 잠 못 들던 밤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머릿속에「수오재기」가 떠올랐다. 나를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직장인으로서의 삶, 관계 속 구성원으로서의 삶, 목표를 가진 드리머로서의 삶. 이 삶에서 내가 있었을까. 주어진 과업을 처리하는데 급급하지 않았을까. 끝없이 투두리스트를 늘어놓고, 그걸 하나씩 지우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았을까. 그 과정에서 나는 나를 존중하며, 나를 돌보았을까. '내가' 과업을 처리하는 건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없고 과업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3.
그래서 「수오재기」가 떠올랐나 보다.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가운데 나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그러니 굳이 지키지 않더라도 어디로 가겠는가?"
과업이든, 관계든 무형의 것들이지만 눈에 보이기 마련이다. 내가 이걸 얼마나 달성하고 있는지, 이 사람과의 관계가 잘 유지되고 있는지. 주의 깊게 보든, 주의 깊게 보지 않든 눈에 뜨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와의 관계'는 의식하고 보려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의식하고 보려고 해도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정신없이 굴러가는 삶 속에서 나는 나를 돌보는 일을 잊어버렸고, 나를 잃어버렸던 듯하다.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에게 좋은 것을 선물해 주고,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습관을 주며 나를 돌보는 일. 눈에 보이지 않으니 눈앞에 당장 급한 일들에 밀려 게을리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훌쩍 도망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하고 있는 것들이 의미를 잃었고, 방향을 잃었다. 하루하루가 마치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열심히 채웠지만 공허한 느낌은 여기에서 왔나 보다.
4.
'수오'를 기억하며, 도망간 나를 다시금 찾아오려고 해야겠다. '나'라는 건 손에 잡힌 듯해도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다시금 훌쩍 도망가버리곤 하니까. 다시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