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퇴근 인파를 헤집고 도착한 횡단보도 앞, 금방 초록불이 켜졌다. 우회전하려던 차 앞을 지나쳐 저 멀리 보이는 가로등을 향했다. 대로변에서 곁가지로 뻗은 골목길에 들어서자 마치 신이 이곳을 비호하고 있는 듯, 공간은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따뜻한 밥 내음이 감돌았다. 지친 발걸음을 옮기는 나에게선 짙은 이방의 냄새가 났다.
얼마 전부터 집 앞 슈퍼마켓에선 군고구마를 팔기 시작했다. 봉투를 열고 고구마를 세 개 집어넣었다. 짤랑-. "이거 계산해 주세요." 바코드를 찍던 아주머니는 까만 코트에 단발머리를 한 숙녀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을 건넸다. "아가씨가 고구마를 참 좋아해." 지난 주말, 봉투 가득 고구마를 사 갔던 나를 기억하시는 모양이었다. 늘 맛있게 먹고 있다며 감사 인사를 건넨 뒤 가게를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다. 내 위를 지키던 센서등이 툭, 꺼졌다. 어둠이 순식간에 나를 잡아먹었다. 내심 놀랐으나 놀랄 기운조차 남지 않은 몸뚱이는 반쯤 감긴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곧 엘리베이터가 아가리를 벌렸고, 나는 그 속으로 몸을 실었다.
집에 도착해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세면대의 머리카락, 싱크대의 설거지 거리, 가득 찬 분리수거함...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채우자 답답함에 눈을 감고 숨을 뱉었다. 제대로 쉬는 법을 배운 적 없는, 아니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을 생존의 메커니즘을 거스르는 습관이 붙어버린 탓에 자고 싶어도 잘 수 없었다. 나는 부풀어 오르는 생각을 털어내려 휴대폰을 켰다.
화면 위로 빛이 쏟아졌다. 누군가의 창작물들이 경쟁하듯 쏟아졌다. 살 빠지는 알약, 미래를 점치는 사주, 마음의 평안을 약속하는 책 광고까지. 경쟁을 피해 숨어들어온 방공호에 작은 틈이 생겨버렸다. 그 틈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새어 나오기 시작한 빛은 끝내 나를 잠식했다. 도태될 것만 같은 불안과 외로움, 발버둥 쳐도 다시 옭아매는 상처들 사이를 둥둥 떠다녔다. 벗어날 힘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느낀 그 무력감이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손끝에 따뜻하지만 다소 투박한 종이의 촉감이 걸렸다. 이질감에 몸을 벌떡 일으켜 출처를 찾으려 고개를 돌렸다. 고구마가 담긴 갈색 종이봉투와 아무렇게나 던져진 가방이 보였다. 치열하게 버틴 하루의 끝, 가방 대신 따뜻한 정취가 묻은 봉지를 열었다.
어릴 적 겨울이면 아버지는 밤마다 야식을 드셨다. 군고구마, 군만두, 라면, 어묵탕 같은 것들 말이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작은 상 위로 야식이 하나씩 들려 나왔다. 어느 날은 군고구마에 흰 우유 한 잔이었다. 고구마를 사기 위해 들렀던 마트 위치부터 누가 씻고 구웠는지까지, 세세한 이야기들이 오가며 한밤의 다과회가 시작됐다. 아빠가 어릴 때 먹었던 간식 이야기로 번지다가도, 누군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며 화제가 전환되기도 했다. 화목한 날은 웃으며 양치하러 흩어졌고, 가끔 말다툼 끝에 누군가 우는 날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따뜻한 겨울밤의 조명이 더해져 이제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된다.
돈 버는 용병이 아닌, 고구마를 좋아하는 작은 숙녀로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머릿속으로라도 그려볼 수 있는 따뜻한 집이 있다는 것. 그 두 가지 사실이 마음을 적시자 기분 좋은 온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을에 들어서며 맡았던 그 다정한 향이, 내게서도 배어 나오는 듯한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