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산 한 모금, 이완 한 스푼

by 파롤


승훈은 틈날 때마다 재희에게 말한다.


“상사 이기려고 하지 마. 돌아서면 결국 후회해.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도 나온 말이잖아.”


승훈은 재희가 속한 팀의 리더다. 작고 둥근 인상에 밝은 표정, 신뢰를 주는 목소리와 친절한 태도를 가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면모가 하나 더 있다. 웃으며 돌아서는 찰나, 표정이 악마처럼 돌변한다는 것. 방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친절과는 정반대의 독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흡사 지킬 앤 하이드 같다.


“그건 본인의 선택이죠. 아무리 상사라도 상식과 논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면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거니까요. 상사 입장에서도 후배가 옳은 소리를 하면 한 번 더 고민해 보고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거고요. 무조건 참고 ‘예스맨’으로만 살면, 그 삶엔 후회가 없을까요?”


승훈은 재희를 흘겨본다. ‘이기려 들지 말라’며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시도해도 재희는 흔들림 없는 마이웨이다.


“난 사내 정치가 필요하다고 봐.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일을 요청하면 내 일부터 처리해 줄 사람들을 포섭해 두는 거지. 내가 원하는 팀원은 그런 사람이야. 내 말을 사람들한테 확성기처럼 영향력 있게 전파해 주는 사람. 직급이 올라갈수록 그런 영향력으로 일하는 거거든.”


재희는 승훈의 입장에선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권력을 쥐면 그 위치에 맞는 욕망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슬픈 현실은, 정작 승훈에게는 그런 영향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팀장님은 참 무능해. 문제 해결 능력은 없고 여기저기 말 옮기기에만 바쁘잖아. 난 팀장님한테 매 맞고 사는 여자라니까.”


“착한 아이 콤플렉스도 심해. 그래서 내가 어디까지 하나 보려고 일부러 막 대하기도 한다니까?”


“그래,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 거지 뭐.”


사내 정치를 잘해서 승훈의 총애를 받는 영옥과 현지, 은영이 점심시간에 그를 씹어대고 있었다. 자신들을 가장 아끼는 상사를 뒤에서 난도질하는 세 사람을 재희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팀장님도 노력 많이 해요. 그렇게 비난만 하는 방식보다는 팀장님이랑 회의를 해서 문제를 같이 해결하는 쪽으로 얘기해 보는 게 낫지 않아요? 일이 너무 많은 게 문제라면 스케줄을 공유하면서 업무 우선순위를 정리해 봐요. 저도 도울게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영옥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게 말이야... 스케줄이라는 게 그때그때 바뀌어서 공유하기가 좀 그래.”


재희는 알고 있었다. 틈만 나면 세 사람의 자리는 종종 비어 있었고, 돌아온 뒤에도 일보다 사람 이야기가 더 길어졌다는 것을. 그들은 외근이 잦은 팀장의 눈을 피해 한두 시간씩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영옥과 현지, 은영은 남자 상사들이 많은 환경을 이용해 ‘애교 작전’을 펼치곤 했다. 영옥과 은영은 상사인 재동에게 서슴없이 스킨십을 하고 반말을 섞어 쓴다. 회의 도중 영옥이 재동의 얼굴을 만지는 돌발 행동을 하자 재동이 당황하기도 했다. 현지 역시 재동에게 ‘자본주의 미소’를 띠며 살갑게 다가간다. 동아리 선배 같은 포지션을 꿈꾸는 재동에게 이들의 작전은 백발백중이었다.


재동의 비호 아래 세 사람의 험담 커피 타임은 나날이 길어졌고, 재희는 결코 그 자리에 합류하지 않았다. 재희에게 애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터에서 그런 방식으로 상사를 대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넌 왜 우리랑 같이 안 해? 우리가 뭐 잘못했어?”


결국 현지와 영옥이 재희에게 물었다.


“전 남 욕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요. 그 시간에 문제를 해결하거나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거든요. 험담만 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부정적인 기운만 주고받게 되잖아요. 전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두 사람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선배는 너무 곰 같아. 여우처럼 굴면 편하게 살 텐데. 난 여우 같은 사람 싫어해서 피해도 많이 봤지만... 그래도 선배는 좀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재희를 안쓰럽게 여긴 후배 성재가 말했다.


“사회엔 꽃 같은 사람이 있고 연필심 같은 사람이 있대. 너도 꽃처럼 굴어. 연필심처럼 자신을 깎아가며 소모되지 말고.”


영진이 말을 보탰다.


“넌 여우처럼 생겨서 곰 같이 행동하니까 그게 좋아.”


다른 팀의 수연 팀장도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자연을 욕하지는 말아요. 여우랑 곰이랑 꽃이 무슨 죄예요.”


재희의 속마음이 툭 튀어나왔다. 그들이라고 몰라서 그런 말을 했을까. 한편으로는 저들과 같은 부류로 묶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사실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승훈과 영옥, 현지, 은영. 서로를 향해 방긋 웃다가도 돌아서면 사악하게 변해 서로를 헐뜯는 모습은 결국 ‘유유상종’ 일뿐이다. 재희는 자신이 그 결에 맞지 않는 사람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냥 나답게 살래. 이런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재희는 웃었다.


“나 사회성 떨어지나 봐. 근데 나도 사실 엄청나게 참는 거야. 참다 참다 화병 날 것 같을 때 터져 나오는 진실의 말들이거든. 이득을 얻으려고 아닌 걸맞다고 하는 건... 도저히 못 하겠어. 그래도 넌 이런 나를 좋아해 주잖아.”


재희의 동료들이 웃으며 재희를 바라본다. ‘그래, 네가 좀 미련해 보여도 제 길을 가는 그 용기가 가상하다’는 듯한 눈빛이다.


“난 내 믿음대로 살아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내가 잘못된 길로 간다 싶으면 꼭 얘기해 줘. 난 내가 나를 좋아하는 삶을 살고 싶어.”


재희는 맥주 한 캔을 따서 탄산 한 모금, 이완 한 스푼을 마음속에 들이켰다.


이전 01화사내 정치 못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