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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윤식 Jan 25. 2019

조지 오웰, 위건 부두에서 무얼 봤나

위건부두로 가는 길, 1937

The road to wigan pier, 1937


위건부두로 가는길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사 - 1만2000원


나는 너를 차별한다. 당신에게 "사람을 차별하나요?"라고 물어보자. 대부분 "아니요"라고 말할 것이다. 거짓말이다. 다만 자신이 '남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길 바랄 뿐이다. 남을 차별하는 건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다른 인간을 차별할까?


조지 오웰은 계급과 지위에서 발생하는 차별에 주목했다. 차별이란 을에서 갑이 아닌 '갑에서 을'로 향하는 현상이다. 형사 사건에서 피해자 조사를 우선하듯 오웰도 먼저 을의 삶을 궁금해 했다. 그런 계기로 대공황 속에서 대량 실업으로 고통받는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의 삶을 조사한다.


취재 방식이 남달랐다. 답사, 인터뷰 등 간접적인 방식은 피했다. 직접 광부의 집이나 노동자들이 묵는 싸구려 하숙집에 머물며 두 달간 조사 활동을 펼친다. 그 결과 1937년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출판됐다.


1부는 탄광 지대 노동자의 밑바닥 삶을 그려낸 르포르타주다. 2부는 각 계층이 가진 특징이 무엇이며, 어떤 이유로 발생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관한 오웰의 생각이 적혀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기록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묘사가 뛰어나다. 읽다 보면 하숙집의 악취가 내 코를 찌르는 듯하다. 막장 속의 탁한 공기와 소음이 전해져 갑갑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책의 백미는 현상 속에 숨겨진 속물을 읽어내는 오웰의 시각이다.


그는 "해군 장교와 그가 다니는 식품점 주인은 소득이 비슷할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둘은 동등한 사람은 아니다"고 말한다. 모두가 알지만 뱉지 않는 말이다. 1936년의 생각이지만 2018년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한 얘기다. 그러한 오웰의 시각 몇 가지를 아래에 옮겨봤다.


하숙집과 막장의 세계

출장 판매원, 떠돌이 배우, 신문 외판원은 오웰이 머문 브루커 부부 하숙집에서 가장 가난했다. 그는 생전 처음 신문 외판원이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언론사에 고용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구독을 따냈다. 하루에 최소 스무 건의 구독을 따내지 못하면 잘린다. 급료는 주급 2파운드에 불과했고 실적에 대한 수수료도 아주 적다. 신문사에서는 가난뱅이나 실직자만 외판원으로 고용한다. 그들은 최소 구독 건수를 채우기 위해 죽어라 일하다 진이 빠지면 그만둔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


오웰이 하숙집에 만난 외판원은 주당 1파운드의 숙식비를 낼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약간의 숙박비만 내고, 부엌 한구석에서 가방에 가지고 다니는 베이컨과 빵을 꺼내 먹었다. 그들의 삶에 대해 오웰은 "나는 그들의 일이 워낙 절망적이고 지독한 것이어서 어떻게 감옥이라는 대안이 있는데 그런 일을 계속 참고 하나 싶었다"고 말했다.


오웰은 하숙집에서 머문 시간을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이따금 그런 곳들을 찾아가 냄새를 맡아볼(냄새를 맡는 게 특히 중요하다) 의무 같은 게 있다. 가서 너무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 게 낫겠지만 말이다."고 정리한다. 이후에도 그는 서구 계급 차별의 문제로 '냄새'를 계속해서 언급한다.


막장에서 일하는 광부를 보면서 작가는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들이 없으면 지상의 세계도 없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에서 대서양을 건너는 것, 빵 굽는 것에서 소설을 쓰는 것까지, 모든 게 석탄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가 영국 북부에서 차를 몰고 가며 도로 밑 수백 미터 지하에서 광부들이 석탄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는 너무 쉽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당신의 차를 모는 것은 그 광부들이다."고 지적한다.


광부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따라 처신한다. 노동계급에게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려야 하고,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해야 하는 것은 일상이다. 오웰은 "무수히 많은 영향력이 끊임없이 노동자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피동적인’ 역할로 축소해버린다. "고 꼬집었다.


주택문제와 실업수당으로 사는 사람들

오웰은 주거기본권을 강조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번듯한 집을 줘보라. 그러면 그들은 그것을 번듯하게 가꾸는 법을 금세 배울 것이다"며 "나아가 근사한 집을 주면, 그들은 그 수준에 맞춰 보다 자존적이고 청결한 생활을 해나갈 것이고, 아이들은 더 나은 삶을 시작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개발은 신중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거주민들이 누려온 삶이 박탈될 수 있어서다. 그는 "중산층에게는 맥주 마시러 나갈 때 좀 더 멀리 가야 하는 정도의 문제가 노동 계급에겐 일종의 친목 클럽인 선술집이 없어지는 문제, 즉 공동체 소멸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염려했다.


작가는 많은 실업자도 만났다. 그는 "실업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에서는, 무엇엔가 전념한다는 것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기대감’을 발휘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며 "실업자들이 덫에 걸린 짐승처럼 놀라고 멍한 상태로 자신의 운명을 방관하고만 있었다."고 전한다. 이어 "사람들이 괜히 덤벼들다 자기만 더 상처 입는 짓을 그만둬버린다"고 적었다.


노동계급 가족과 중산층 가족

계급마다 가정의 거실 풍경은 다르다. 오웰은 노동 계급의 가정을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따스하고 건전하고 인간적인 공기가 있다. 나는 일거리가 꾸준하고 벌이가 괜찮다면 육체 노동자가 ‘배운’ 사람보다는 행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묘사한다. 이어 "노동 계급 가족은 중산층 가족과 마찬가지로 결속하되 그 관계는 훨씬 덜 억압적이다."고 보았다.


특히 "노동자는 가문의 위신이라는 끔찍한 짐을 맷돌처럼 목에 걸고 다니지 않는다."며 "중산층은 빈곤에 처하면 완전히 망가진다"고 지적한다. 한편 "노동 계급은 동등하다고 여기는 상대면 누구에게나 꾸밈없이 말한다. 또한 중산층은 원치 않는 것을 주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일단 받아들일 텐데, 노동 계급 사람은 바로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고 기록했다.


서구 계급 차별의 진짜 비밀은 무엇일까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 작가는 어릴 때 자유롭게 쓰곤 하던 섬뜩한 말인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를 계급 차별의 진짜 원인으로 지적한다. 우리는 인종적 혐오, 종교적 적개심, 교육이나 기질이나 지성의 차이, 심지어 도덕률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입 냄새가 지독한 사람에겐 호감을 느낄 수가 없다.


오웰은 "아주 어릴 때부터 노동 계급 사람의 신체에는 묘하게 역겨운 데가 있다는 믿음을 습득하게 되는데, 그러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사람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워진다."고 비판한다. 이어 "평균적인 중산층 사람이 노동 계급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 믿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러운 존재라 믿도록 교육받는다면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고 설명한다.


왜 오웰은 경찰에서 부랑자가 되었나

속물근성은 계속해서 뿌리를 뽑아주지 않는 한 무덤에 갈 때까지 메꽃처럼 들러붙는다. 오웰이 미얀마 제국 경찰로 근무할 때다. 미얀마인들은 침략자인 영국의 사법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절도로 갇힌 현지인은 자신이 외국 정복자에게 희생됐다고 생각했다. 그때를 오웰은 "유치장의 묵직한 카운터 뒤나 감방의 철창 뒤에서 그의 얼굴이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인간의 표정에 무심해지도록 자신을 단련하지 못했다."고 썼다.


이후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오웰은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 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에 맞서고 싶어 졌다. 그렇게 부랑자가 되었다.


계급의 강은 사라질 수 있는가

계급 타파 문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웰은 "안타깝게도 부랑자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계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자신의 계급적 편견을 어느 정도 없앨 수 있을 뿐이다."고 말한다. ‘자신’만큼은 계급적 불의를 당연히 벗어나 있는 줄 아는 지식인들의 속물근성도 지적한다. 또한 그들의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들춰낸다.


마지막으로 그는 "계급 없는 사회에는 아마도 계급 간 반목과 속물근성은 없겠지만 우리 모두 똑같이 행동하고 사는 게 지극히 행복한 세상은 아닐 것이다"며 "그보다는 아마 우리의 모든 이상과 도덕과 취향이, 곧 우리의 ‘이데올로기’가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삭막한 세상일 것이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이룰 수 없는 이뤄서도 안 되는 세상을 만들려고 발버둥 치며 오늘을 사는 것이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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