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윤식 Mar 06. 2019

애잔해서 아픈 소설, <토지>

등장인물 700명, 집필기간 25년, 시대배경 1897년-1945년

박경리 선생님의 생전 집필 모습


토지 1~20권 + 인물 사전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7만 원


'토지'는 많은 사람이 완독에 실패하는 책이다. 이유는 분량이다. 박경리 작가는 1994년 이 책을 16권으로 완간했다. 지금 서점에서 팔리는 토지는 2012년에 재출간된 20권 세트다. 여기에 인물사전 1권이 추가된다.


경험에 비춰보면 토지 한 권을 읽는데 꼬박 하루가 소비된다. 끼니를 거르고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읽으면 한 권을 덮는다. 그렇게 20일이 걸린다. 하지만 직장인에게는 불가능한 셈법이다. 지인들에게는 1년 안에 읽으면 성공이라고 말해준다.


단어도 어렵다. 전남과 경남의 사투리, 생소한 고유어와 일본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모르는 단어는 뜻을 찾아봐야 한다. 그로 인해 지체되는 시간이 상당하다. 모든 책의 뒷부분에는 어휘풀이가 덧붙여졌다.


그럼에도 토지를 읽어야 할까? 왜 사람들은 토지를 추천하는 것일까?


첫째, 여성이 중심인 작품이다.

시대 배경은 조선의 남성 중심 문화가 지배적인 일제강점기다. 작가는 그 시대의 이야기를 여성으로 끌어간다. 작품의 시작과 끝에는 최참판댁이 존재한다. 가문의 가장 어른인 윤씨 부인, 며느리 별당아씨, 딸 최서희로 이어지는 줄기를 토지의 기둥으로 삼았다.


둘째, 일제 강점기의 우리 역사가 담겼다.

우리는 날짜와 사건으로 과거를 공부한다. 토지는 그 상황을 이야기로 전달한다. 작품 속 인물의 눈으로 일제의 횡포와 수탈을 그려낸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국제 정세와 그 속에서 전개되는 독립운동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대다수가 역사책에서 배우지 않았던 것들이다.


셋째, 동학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요 인물들이 동학에 소속되어 일제와 싸운다. 그 과정에서 변화하는 지배층-피지배층의 관계, 노비해방의 한계 등을 보여준다. 일제의 토벌 작전으로 동학은 사라지지만 정신은 계속된다. 진주에서는 형평사 운동이 등장하고 작품 후미에는 광복을 준비한다.


넷째, 민초를 내세웠다.

역사는 강자의 이야기이자 지배층의 이야기다. 하지만 토지는 노비, 백정, 기생, 농민, 상인 등 하위계층의 삶으로 시대를 서술한다. 평생 차별받고 배고픔에 시달린 백성의 오감이 일제의 총칼 아래서 어떻게 움직이는 적나라하게 전해준다.


다섯째, 인간의 보편성을 말한다.

누구나 악이 될 수도 있고 선이 될 수도 있다. 혹자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상처와 슬픔이 포함된다. 반대로 보잘것없이 보이는 사람도 그 누구보다 따뜻한 심장과 칼날 같은 용기를 가졌을 수 있다. 무엇이 답이고 무엇이 오답일까. 토지는 다양한 군상의 인간을 보여주면서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


여섯째, 이념보다 민족을 강조했다.

일본의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면 우리에게는 어떤 철학이 필요해질까. 누군가는 무장으로 누군가는 교육으로 독립에 다가서듯이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라는 선택지를 받게 된다. 식자층들은 그것을 놓고 논쟁한다. 하나 내일의 삶도 장담을 못 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념투쟁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작품에서는 민족을 최우선의 가치로 놓는다.


일곱째, 귀로 읽는 작품이다.

긴 문장은 의미가 헷갈리기 쉽고 읽기 불편하다. 하지만 박경리 선생님의 문장은 다르다. 3~4줄 길이의 글을 정확한 호흡이 단단히 잡아준다. 소리 내어 읽어보면 노랫가락처럼 들린다. 그 리듬이 재미있고, 그 문장이 마음을 이끈다.


여덟째, 사투리가 현실감을 더해준다.

최근 '말모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 조선어학회가 극장에서 몰래 지역어를 수집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사투리도 우리말이지만 우리는 표준어에만 집착한다. 그것에는 지역의 문화와 민족이 정신이 담겼다. 시골말로 표현되는 토지 속 대화를 읽는다면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아홉째, 결국은 '한'이다.

박경리 선생님의 삶이 토지에서 느껴진다. 웃다가 울고 희망을 품다가 고개를 숙이게 된다. 강물의 자잘한 물결부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까지 모든 것이 묘사된다. 그것들에 '한'까지도. 그 생각과 감정과 시선이 아름다웠다.


짧게 토지를 정리했다. 하지만 그 장엄함이 그 심연이 어찌 몇 글자로 정리가 될 것인가. 이렇게 쓰는 글도 작품의 여운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아닐까 싶다. 그 애잔함이 궁금하다면 방대함에 기죽지 말고 과감히 토지를 읽어 보시라. 후회가 없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빈부 계급 노동에 관한 고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