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내가 생각하는 미국은 뉴욕이었다. 신혼 초 아내와 함께 간 유일한 미국 도시가 뉴욕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언뜻 상상한, 주로 우려했던 이미지에 맞아떨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7년 뉴욕은 화려하고 풍족해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차갑고 친절하지 않았다. 사실 한 겨울이었기에 추운 게 당연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뉴욕은 곳곳이 장식으로 반짝이기도 했지만, 꽤 많은 상점이 문을 열지 않았다. 딱 '크리스마스'네 하고 느껴지는 실내장식과 멋진 옷을 차려입은 환한 미소의 손님으로 가득 차 있던, 포근한 조명의 식당 앞에 놓인 메뉴판 가격을 봤다. 가슴속에 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저 차가운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걸로 크리스마스 기분을 즐겼다.
뉴욕에서 토론토로 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표를 살 때였다. 딱딱하고 단호한 어투의 직원은 처음부터 고압적으로 우리를 대했다. 캐나다 달러와 모양은 달랐지만, 6개월 넘게 달러를 사용한 경험은 그녀가 건넨 금액이 부족하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게 했다.
"잔돈을 부족하게 준 것 같은데."
"아니야 그 금액이 맞아."
이런 대화가 조금 길게 오고 가는 동안 그녀는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결국 그녀 손으로 지폐와 동전 하나하나를 다시 세면서 그녀의 계산이 틀렸다는 게 확인됐다. 부족한 금액을 채워 건넬 때, 그렇게 말이 많았던 그녀는 '쏘리'라는 짧은 단어를 뱉지 않았다. 그렇게 차가운 뉴욕을 떠났다.
그 뒤로 영화나 책으로 보는 어떤 간접적인 경험도, 직접 경험한 기억을 바꿔 놓지 못했다. 그런 뉴욕에 대한 편견이 지워지기 시작한 것은 다니던 회사에서 보내준 인센티브 투어에서였다.
한 해 동안 성과가 우수한 아홉 명을 뽑아 해외로 보내줬다. 미국이라는 지역만 정해줬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계획하면 미국에 있는 현지 여행사에서 정한 일정에 맞춰 준비하는 여행이었다. 우리는 미국 동부를 여행지로 선택했고 여행의 마지막은 뉴욕이었다. 뉴욕의 하이라이트는 유명한 스테이크를 먹는 것과 <오페라의 유령>을 관람하는 것.
저녁을 먹고 뮤지컬 장소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던 우리는 생각보다 늦어지는 스테이크에 조바심이 났다. 안주 없이 와인만 홀짝거리던 일행은 더 이상 기다리다가는 스테이크도 제대로 못 먹고, 뮤지컬도 놓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급기야 스테이크를 포장해 놓으면 가이드가 찾는 것으로 결정하고 뮤지컬을 보기 위해 떠났다.
시차를 완벽하게 극복하지도 못했고, 와인의 취기까지 오른 나는 도입부부터 마음 깊이 울리는 천상의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잠들었다. 거의 끝나갈 무렵 푹신한 호텔 침대에서 곤히 잠들다 일어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잠을 깼다. 놓친 뮤지컬이 아쉬웠지만 졸면서도,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 웅장한 소리는 내 몸속으로 들어왔었을 테니, 특별한 경험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
여행의 시작이었던 올랜도와 마이애미에서도 개인적으로 온다면 결단하기 어려운 체험을 돈 생각하지 않고 해 보면서, 미국의 풍족함은 고스란히 내 기억 속에 남았다. 풍족한 미국을 부족함 없이 느낀 여행이 되었다. 거기에 하나 더 생각나는 기억이 있는데, 그 아홉 명 중 자유분방한 생각과 행동을 보여준 막내가 있었다.
그녀는 가끔 우리가 계획한 하루 일정을 모두 참여하지 않으면서,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선택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는 식사하러 같이 이동해야 하는데 시간을 지키지 않아 모두를 기다리게 하기도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에 크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조금씩 그녀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그녀는 마지막에도 친구가 사는 다른 도시에 가기 위해, 우리 일정이 끝나기 전 미리 떠나는 것으로 계획했다. 다들 꾹꾹 참은 마음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 직전인 마지막 날, 다행히 그녀에게 일갈하는 사람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길을 나서며 숙소에 남겨놓은 그녀의 작은 선물과 손 편지. 그녀가 틈틈이 혼자 있던 시간에 우리를 생각하면서 선물을 사고, 글을 썼다는 생각에 가슴이 몽글해졌다.
이런 경험은 뉴욕, 미국을 풍요롭고 포근하고 따순 기억으로 남게 했다. 그렇게 좋았던 기억은 여행 중 가장 긴, 5일이라는 일정으로 계획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머물 뉴욕은 또 어떤 기억으로 자리 잡힐지 기대하며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