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번째 이야기
뜻하지 않은 이별이 있은 후 한동안 이 상황을 인정하기까지 참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가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씩씩한 척 연기를 했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 억지로 웃으려고도 했고, 나가지 못했던 모임에 더 자주 다니며 일상처럼 지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이 허전함과 슬픔을 달래기에는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휴직을 낼까도 생각했지만 뭐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는 생각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제 감정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하지 않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했던 건 '정말이지 이 어려움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세상을 등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보란 듯이 이겨내서
다시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습니다. 같은 층에만 수십 명의 동료들이 근무하는 회사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게 말이죠. 이성적으로 감정이 일관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해온 가까운 몇몇 동료들의 도움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요. 점점 시간이 지나 일을 하면서도 순간순간 감정이 복받치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았습니다. 아직 저의 아픔이라는 감정은 현재 진행형이었거든요. 그래서 퇴근할 때가 되면 집까지 거리가 약 10킬로 정도 되는데 매일매일 걸어서 돌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2월의 한 겨울 집으로 걸어오는 시간 동안은 내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칼바람 맞으며 눈물을 닦아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원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 순간만큼은 슬픔으로 가득했던 현재 나의 감정에 충실했습니다. 마치 피에로와 같은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마도 주저앉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야 집에 가도 정신을 다잡고 다음 날 일할 때 조금이라도 잊고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두 달이라는 기간 동안 바쁜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었습니다. 밤 낮 없이 마감에 매달려야 하는 건축가의 업무 특성상 할 일이 너무나 많이 있었거든요. 건축물 계획을 위해 대지 답사도 가야 하고, 건축물 사진도 찍어야 하고, 공모 취지에 맞는 건축법도 숙지해야 하고, 표현을 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도 잘 다뤄야 하고, 개념 정리를 위해 글도 많이 읽고 써야 하고, 제출물을 위한 기획서도 잘 써야 하고, 협력 업무를 위한 모형제작도 잘 이해해야 하고, 편집실, 출력소, 발주처 보고 기타 등등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마음만 먹으면 잠도 자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제 자리가 어느덧 맨 앞에서 팀원들을 이끌어 가야 하는 위치이기도 했기 때문에 더욱 집중을 해야 했어요. 정말이지 스스로를 봐도 너무 무섭게 작품을 만드는데만 몰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 것 같습니다. 결과물을 제출하고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운이 좋게 당선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다시 느껴본 작은 성공은 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자존감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건축을 할 때 가장 빛이 나는 게 바로 나였는데,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사람들이 사용하는 건축물을 디자인한다는 것도
있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20대 나를 빛나게 해 주었던 제 분야에서 제가 사랑하는 작품 활동을 통해서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아마도 인생의 다양한 터닝포인트중에 하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만감이 참 교차했던 것 같아요. 저에게는 더 좋은 곳에서 공부를 하는 꿈과 제 아이를 더 좋은 환경(경쟁만 요구되지 않는)에서 공부를 시키고자 하는 작은 꿈이 있었거든요. 정말이지 학창 시절 열심히 전공 공부를 했었습니다. 조기졸업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적도 좋았고, 국내에서 석사과정도 잘 끝마쳤습니다. 점점 제가 하는 공부에 정말 많은 흥미를 느꼈고 그래서 내 분야에서 꼭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휴직을 내고 낮에는 육아를 했고, 아이를 재우고 나서는 새벽시간을 활용해 유학을 위해 준비를 하면서 잠자는 시간 줄여가며 도전했던 시기였습니다. 반년을 준비한 끝에 해외의 다수 학교에 입학허가를 받기까지 내 미래와 가족의 미래를 어쩌면 더 멋지게 만들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우연치 않은 사건들로 인해 가슴 아픈 이별을 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학교 입학도 연기했고 했지만 끝내 포기하는 메일을 보냈을 때가 아마 그 당선을 하고 난 직후였던 것 같습니다. 노력했고 기회를 받아봤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한발 물러서지만 꼭 더 좋은 환경에서 내 꿈을 위해 공부를 할 것이다'라는 다짐과 함께 출력해놓은 합격증을 제 손으로 찢으면서 속상한 마음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참 많이도 마셨던 것 같습니다. "사람 인생이라는 것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구나" 제 의지와는 다른 요인에 의해서 스톱이 되다 보니 어리석지만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앞만 보면서 수도 없이 달릴 때도 이런 일을 대비해 항상 플랜 B를 세워두길 잘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는 제가 세워두었던 차선책의 목표를 선택하게 되었답니다.
Note
이 어려운 시기에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중에 잘할 수 있는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건축을 통해서 어려움을 극복 했듯이 많은 분들도 분명히 자기만의 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잘 찾아보시길 바라겠습니다. 자신에게 어려운 일이 생겨도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있다면 이를 통해서 조금씩 내가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해봐요. 꼭 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