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20세기 말의 어느 여름.

by 윤타

20세기 말의 어느 여름,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가르치는 알바를 하고 있었다. 원장의 부탁으로 좀 나이가 있는 여학생 한 명을 집중해서 봐주었다. 나이가 좀 많다 해도 나보다 대여섯 살 어린, 아직 풋풋한 20대 초반이었다.


그 여학생을 데리러 같은 나이의 남자 친구가 자주 찾아왔다. 그 여학생은 남자 친구가 홍콩 배우 유덕화를 닮아서 참 좋다고 말했다. (음. 닮긴 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간혹 있다. 분명 잘 생기고 아름다운 유명 연예인의 겉모양을 닮긴 했으나 잘 생김과 아름다움은 닮지 못한.)


어쨌든 그 남자 친구는 한마디로 '상남자'였다. 스스로 자신이 '남자답다'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 여학생도 남자 친구의 '남자다움'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머리카락이 등의 반을 넘을 정도로 길었다. 웬만한 여자보다 길었다. 메탈 키드(실은 아저씨)였다. 그 남자 친구는 그런 나를 처음 보고 '전형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 전형적인 표정에 담긴 감정은 당연히 혐오였다. 그의 헤어 스타일은 거의 스포츠머리에 가까울 정도로 짧았다.


그는 여자 친구가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다가 '상남자'다운 넉살을 부리며 내게 말을 건네곤 했다. 그 마초스러운 말이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무더웠던 어느 날, 그가 내게 말을 건넸다.


"머리가 그렇게 길면 오늘 같은 날 덥지 않습니까?"


그는 참다 참다가 드디어 머리 얘기를 꺼냈는데, 이제 나와 좀 친해졌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 나이가 같거나 어렸으면 '대가리 깎아라, 새끼야.'라고 했을 것 같은 말투다.


"그러게요, 나처럼 머리가 긴 여자들도 오늘 같은 날 참 덥겠어요. 여자 친구도 꽤 더워 보이는데 oo 씨처럼 (남자 친구 이름) 짧게 자르라고 해봐요."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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