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타 Jan 22. 2023

단편. 뭐 어쩌라고.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벌써 40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그날 일이 뚜렷하게 기억난다. 가을운동회 예행연습날이었다. 1학년 모두 운동장으로 나갔다. 흰색 체육복과 뒤집으면 청색과 백색으로 바뀌는 모자를 썼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반별로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고, 가운데 운동장을 빙 둘러싸고 앉게 했다. 나는 번호 순서대로 맨 앞에 앉았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응원하는 법을 알려주고 대열을 이탈하지 않도록 지도했다. 모든 종목들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이어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앞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던 선생님들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저 멀리 구령대 옆 천막밑에 몰려 있었다.


이어달리기를 구경하던 아이들은 점점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이제 아이들은 경기가 아니라 자신들이 질러대는 소리와 열광적인 분위기에 푹 빠져들었다. 뒤에 있던 아이들 몇 명이 일어나 앞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밀기 시작했다. 나와 내 옆에 앉아 있던 아이들 3~4명이 앞으로 넘어졌다. 그러자 뒤에서 밀던 아이들은 더욱 신이 나서 환호성을 질렀고, 넘어진 아이들 위로 몸을 던졌다. 차례차례 몸이 포개졌다. 나는 맨 밑에 깔렸다. 아이들의 무게로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아이들은 연신 꺅꺅거리며 교대로 깔린 아이들 위로 뛰어들었다. 그 아이들은 이어달리기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는 아이들이 내 몸 위에 하나씩 쌓여갈 때마다 가중되는 압력을 고스란히 느꼈다. 갈비뼈가 납작해지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 바로 위에 있던 아이에게 비키라고 소리 질렀다. 그 아이는 자신도 빠져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 내어 소리소리 지르고 다리를 바둥거렸다. 누군가 뒤에서 바둥대는 내 다리와 발을 밟아댔다. 발버둥 치는 내 다리 때문에 올라타는데 걸리적거린다는 소리가 들렸다.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분노는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고통을 벗어나려는 나의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인에 의해 내 존재와 의지가 그들의 쾌락을 위한 놀이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눈앞이 뿌옇게 노래지다가 조금씩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죽는 건가.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구나.


순간 몸이 시원해졌다. 내 몸 위에 쌓여 있던 아이들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선생님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선생님한테 혼날까 봐 장난을 멈춘 거였다. 나는 일어나서 내 위에 올라탄 아이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분노와 울음이 뒤섞인 목소리로 힘껏 소리 질렀다. 숨을 못 쉬어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냐고, 죽을 뻔했다고, 소리소리 질렀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아이들의 말과 행동과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뭐 어쩌라고” 몸집이 큰 한 남자아이가 내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 주변에서 나를 쳐다보면서 킥킥거렸다. “에이, 한창 재밌었는데!” 아이들은 아쉬운 표정과 잘 놀았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순박하게 활짝 웃었다. 악귀들이다. 사람의 모습을 한 악귀들이 착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내 주변에 서식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운동장 땅바닥에 짓이겨진 내 얼굴의 입속에 가득 찬 흙먼지의 짠맛, 나를 덮어 누르던 아이들의 시큼하고 꾸질한 땀 냄새, 내 위에서 환호성을 지르던 아이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축축한 침방울의 끈적임, 그 역겨운 입냄새가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 

작가의 이전글 불편해봤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