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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타 Mar 02. 2023

길 위에서

상쾌하지 못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식사 중인 분들은 그냥 넘기시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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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를 읽었다. 비둘기를 혐오하는, 아니 혐오를 넘어 공포를 느끼는 주인공(50대 남자, 경비원)의 심리가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글에서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했다.


어느 날 주인공은 자주 가던 공원에서 한 노숙자와 마주친다. 주인공은 그 노숙자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 노숙자가 가림막도 없이 개방된 도로에서 노상방분을 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의 불행한 삶이 그래도 노숙자보다는 낫다며 스스로 위로(합리화)한다. 소설 속에 묘사된 디테일한 노상방분 장면은 엄청났다. 글만 읽는데도 살짝 속이 메슥거릴 정도였다.


소설을 읽은 바로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걸었다. 보행로로 조성되어 자동차나 자전거, 킥보드가 다닐 수 없는 길이다. 이 길에서는 담배도 피울 수 없다. 걷기에 참 좋다. 그래서 조금 멀리 돌아가긴 하지만 언제나 이 길로 다닌다.


오르막길로 접어들었다. 길 오른편에는 위로 솟은 작은 언덕이 있고 길 왼편은 아래로 떨어지는 비탈이 있다. 길 양쪽이 언덕과 비탈로 둘러 싸여 있어서 완전히 개방된 공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20여 미터 앞에 한 남자 노인이 언덕을 뒤로하고 쭈그려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뭔가 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엉덩이 부분의 바지 색깔이 달랐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이하 세세한 묘사는 생략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로 뒤돌아 옆길로 빠져나갔다. 이 길을 10년 이상 지나다니면서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어제 읽었던 소설의 한 장면이 그대로 내 눈앞에 재현되다니. 이것은 칼 융이 말한 '동시성 현상’인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뭔가 이 세상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목격하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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