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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타 May 14. 2023

문드러진 홍시

입시미술학원에 다닐 때였다. 4수하던 형과 6수하던 형이 있었다. 둘 다 국내 최고의 미술대학이 목표였다. 둘의 데생 실력은 엄청났다. 예고 다니는 2학년 학생도 있었다. 중학교도 예중을 나왔다. 4수생, 6수생 형들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 친구도 꽤 잘 그렸다.


그 셋은 공통점이 있었다. 학원에 매일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림 한 장을 오랫동안 붙잡고 그렸다. 그리다가 중간에 멈추고 새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가. 그동안 너무 많이 그려서 지겨워진 건가. 정확히는 모르겠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바람이 서늘해지기 시작할 무렵, 그 셋의 그림이 조금씩 이상해졌다. 잘 그리는 건 분명한데 한쪽이 너무 시커멓게 되거나 두터운 양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3시간 안에 완성해야 하는 데생 시험을 봤다. 그 셋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시험을 망쳤다. 시커먼 그림은 너무 익어서 문드러진 홍시 같았다. 형태도 무너졌다. 그날 이후로 그 셋은 입시날까지 원래 실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_

1990년대 말, 라이브 클럽 ‘oo’에서 한 인디밴드의 공연을 구경했다. 리더가 기타를 잘 치기로 유명한 밴드였다. 소문대로 역시 대단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기른 비쩍 마른 한 남자가 무대에서 내려온 리더를 불렀다. 50대 중반은 넘어 보였다. 그는 그 리더를 ‘칭찬’했다. 리더는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그때 그 50대 남자의 태도가 자유로운 예술가라기보다 권위적인 대기업 회장님 같아서 기억에 남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유명한 ‘선배’ 기타리스트였다. 


20여 년이 지나고 유튜브에 올라온 그의 기타 연주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순간, 그때 입시미술학원에서 봤던 4수, 6수생 형들의 너무 익어 문드러져 버린 데생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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